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 21:8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시드기야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이를 예레미야에게 알려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안의 모든 것이 멸절될 것을 예언한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한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B. C. 597-586)에 대하여 그 왕가의 멸망을 예언한다.
모든 게 내면의 죄 때문이다. 외적인 문제 해결은 내적인 변화에 달렸다. 저들 유다는 공공연하게 옥상에서 우상을 숭배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겼다. 당시 유다는 에돔과 모압과 두로와 시돈과 동맹하여 반 바벨론 정책을 펼쳤다. 이를 바벨론이 알고 사드기야를 소환하여 경고하였으나 유다로 돌아온 저는 애굽과의 동맹으로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바벨론으로부터 공격의 명분만 제공한 셈이 된다. 바벨론은 애굽과 유다를 친다.
대외적 문제는 안으로 곪은 민족의 타락과 부패가 원인이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애굽과 동맹하였다가 화를 자초한 것이다. 저들은 수차례 하나님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서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고 죄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했다. 결국 선민의 나라 유다의 시드기야는 왕으로서 회개할 생각은 못하고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인데, 이는 참으로 안이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 처사였다. 당면한 그 심각성을 알았다면 저는 자신은 물론 유다 온 백성으로 회개하고 자복할 것을 명하였어야 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말씀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다. 안 믿는 자들에게는 먼 나라 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믿는 자로서는 말씀으로밖에 달리 구원의 길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겔 18:27-28).” 앞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교훈을 얻는다. 저들 역시 자신들의 선조들이 걸어왔던 길을 통해 충분히 주의 뜻을 안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기도를 부탁하기에 앞서 자신의 직고와 직면으로 주 앞에 고하는 게 우선이다.
종종 누구의 기도 부탁을 들을 때 저의 처한 현실과 그 문제는 이해하나 먼저는 그 자신의 내적인 막힘을 느끼곤 한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그 원인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이를 회피하고 가벼이 여기는 생활이 거듭될 때 저를 위한 기도가 무의미한 것을 직감하기도 한다. 대놓고 뭐라 이르면 듣기 싫어하고 공감과 가벼운 위로만을 바랄 때는 더더욱 기도의 의미는 퇴색된다. “원하건대 주는 눈을 들어 종의 간구함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간구함을 보시고 주께 부르짖는 대로 들으시옵소서(왕상 8:52).” 우리에겐 이와 같은 말씀이 주어졌다.
말씀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있고,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성령은 우리로 깨어 구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려면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직면하고 인정하고 주 앞에 자복해야 하는데, 이는 솔직히 말처럼 쉽지가 않다. 머리로는 알지만 감정적으로는 삭힐 수 없는, 남의 일일 때는 이성적인 판단이 작동하지만 자신의 일일 때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려 드는 것이 사람이다.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이와 같은,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우리의 판단과 기준을 능가하여 나타난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그러나 이는 우리 안에 ‘사랑’ 곧 우리의 전능하신 이의 권능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곧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그래서도 보면 솔직히 어떤 위로나 권면에 있어 가장 원론적인 말씀과 기도를 강조할 때 나름 믿는다고 믿는 자에게 말하기가 어렵다. 이를 우선 강조하려 들면 발끈하기 일쑤인 건 이미 사역자이거나 교회 생활을 한 지 좀 된 사람의 경우이다. 저들과의 대화에서 기도와 말씀은 기본전제로 하고 있겠거니 하다 보니 저의 문제나 고난의 원인은 겉돈다.
오늘 유다 마지막 왕이 되는 시드기야의 경우도 그러한 게 아닐까? 저는 기름부음 받은 왕이다. 저들은 선민이다. 그 익숙함 또는 그러려니 하는 어떤 당위성이 더는 저들로 회개에 무뎌지고 주의 말씀에 우선 청종하려는 기준을 잃게 한 것이 아닐까? 물론 기도는 하겠지. 말씀도 보겠지. 설마 목사인데 또는 수십 년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자인데… 하는 부분에서 의외로 성경 안 보고 기도 안 하는 자들이 저들인 경우가 많다.
좀 민망한 이야기지만 이 블러그도 보면 일주일에 금요일이나 토요일의 경우에 여느 날 보다 방문자가 조회수가 높다. 그 이유는 설교원고를 퍼가거나 참고하기 위함인 것을 안다. 드레그해서 복사해다 붙여 몇 자 고치고 설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느 부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감사한 일이기는 하나 의외로 성경 볼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목회자들이다.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나름, 한다’고 여기는 안이한 마음 때문이다. 가끔 어떤 말을 듣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 ‘누가 기도 안 해?’ 하고 발끈한다. 그런 경우 저는 목사이거나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자이다.
오늘 시드기야의 태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강하게 하였다. 나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도 던지게 된다. 새삼스러우나 사실이다. 신대원 때 한 나이 든 교수가 말하였다. 설교가 익숙해지면 말씀의 은혜가 줄어든다. 서둘러 해야 할 일이 많을 때 상대적으로 기도할 시간이 없다. 대내외적으로 규모가 커지면 누구를 직접적으로 상대하고 위로하여 함께 주의 이름의 부를 시간이 없다. 목사도 직업군으로 한 기능인이 되어간다. 대략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상대적으로 나는 바쁠 게 없는 사람이라 그런가… 누구의 어떤 경우에 있어 특히 저가 목사인지 일반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는 통화를 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우리의 담대함은 주의 뜻을 구할 때이다. 결국 말씀을 듣는 시간이 줄고 묵상하는 바가 적으면 상대적으로 세상으로 휘둘리는 것은 당연하다. 시드기야가 선민, 하나님의 백성의 왕으로서 주변국들과 동맹하여 현실을 타개하고 심지어는 애굽과 동맹하여 적과 맞서려 하였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것도 기도를 부탁하여,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렘 21:1).” 이 사실 하나로 저가 직면한 현실을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2).” 이 어처구니없는 태도에 그 본심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예수께서 이르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는 이 말씀은 생각보다 무서운 의미다. 실은 어제 장모와 같이 예배를 드릴 때 이 구절의 설교를 기독교 방송에서 설교로 들었다며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다. 나는 이를 설명하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나는 이어지는 그 다음 구절을 항상 두려워한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지금 묵상한다. 말씀을 본다. 설교원고에 정성을 다했다. 누굴 위해 기도하며 늘 성전에 있다. … 하는 따위의 소리가 자부심이 될 때는 영락없다.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목적이라면, 기도하는 이유가 오늘의 삶이 조금 더 윤택하기를 바라는 이유라면, 거나 거나 모두 헛일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나는 이 말씀이 제일 두렵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회개가 더는 용납되지 않는 때가 온다.
그렇듯 유다는 멸망하였고 시드기야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 141:5).
목사로 살게 되면서 나는 자주 이 말씀을 음미한다. 내가 부당하다고 여기는 일에 연연해하지 않기를. 내 육신의 이런저런 연약함으로도 기꺼이 주를 찬송할 수 있기를.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9).”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믿음에 속고 사는 경우는 없는지.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장모와 성경을 같이 나눌 때면 내 마음이 저절로 급해질 때가 있다. 어제는 믿고 천국 가는 게 목표라는 어머니의 말에 그보다 더 분명한,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0-41).”
저녁마다 같이 말씀을 나누면서 내가 더 간절하여지는 것을 느낀다. 본인도 곧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을 안다. 이에 같이 나눈 말씀은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6-38).” 이를 설명할 때, 어릴 적 조부 댁에 가면 강원도 원주 평창이라, 곳간이나 툇마루에는 종자씨로 쓸 자루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옥수수 알갱이라 이를 금방 밥과 함께 지어져 옥수수 밥으로 먹을 때에 이것을 땅에 심어 추수 때 거둘 형체가 다르다는 것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시골 학교 때 봄철이면 꽃씨를 한 봉지씩 나누어주곤 하였는데 이를 심으면 이 작은 깨알 같은 것이 어느 것은 국화로 매화로 피어난다는 것이 항상 신기하였다. 그와 같이 우리의 오늘은 훗날 주 앞에서 어떤 형상의 영광으로 피어날지… 정작 우리는 천국 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떤 영광으로 피어나서 누리고 쉼을 얻을지. 각각 누릴 영광이 다르고 그 차등은 격차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믿음의 행함에 따른 것으로, 어제는 이를 설명하느라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어머니는 침대에서 돌아앉아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설명하느라 또 시간이 지체하기도 하였다. 나는 자주 아내에게 ‘우리에게 맡기신 한 영혼’으로 장모님을 객체로 놓는다. 친정엄마 그 이상의 존재인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만일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고 온 유다에 회개를 선포하였더라면 어찌 됐을까? 저가 이미 상실한 신앙은 무엇이었을까? 우린 너무 익숙하게 하나님 앞에 나온다! 설렘이 없고 간절함이나 경외함도 많이 희석되었는지도 모른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혹 언제부터 이와 같은 말씀에 무덤덤해진 것은 아닌지. 설마 기도의 이유와 신앙의 목적이 오늘의 문제 때문은 아닌지? 자, 오늘 말씀은 냉정하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렘 21:8).”
하면,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21:13).
우리로 환난 날에 주를 찾게 하심은 승리가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므로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4:6).
이와 같은 시편의 세계를 살 수 있기를.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91:14).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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