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전봉석 2023. 5. 30. 04:34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예레미야 26:13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26:12

 

 

 

의지적으로 평탄한 데에 서는 일, 그리하여 여호와를 송축함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나의 가는 길을 주가 아심을 확신할 때 이는 마음으로 뿐 아니라 몸으로 부대끼고 맞서 마주하는 것임을 묵상하게 한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따라 백성들 앞에 서서 고한다. 저들은 듣고 흥분하여 오히려 죽이려 한다. 때는 유다 18대 왕 여호야김(B. C. 609-598)이 다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성전으로 예배하러 오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성전을 파괴하고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경고이다. 예레미야는 거침없이 이를 전한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7).” 그와 같은 말씀을 전할 때에 저들의 반응이 어떠할지 모르지 않았다. 오늘 이 설교는 7장 1-15절 내용의 요약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회개는 회개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아직 우리가 오늘을 더하고 사는 데는 기회가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그렇게 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하여,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 32:5).

 

이를 경험한 자는 외친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밤’이 찾아왔을 때 성전을 향해서 선다. 어제는 그렇듯 다음 설교 본문인 시편 134편을 읽고 초안을 작성하며 탐구하였다. 우리가 주를 송축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1).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모든 날들은 밤과 같다. 낮인가 하면 저녁이고 아침이 밝았는가 하면 어둠이 덮인다. ‘보라, 밤에’ 우리는 의지적으로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자들이다. 이를 가리켜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하고 외친다. 주의 종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밤의 일이다. 앞서 순례의 길 첫 걸음은 회개였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120:1-2).

 

우리가 주를 영접하고 나의 구주로 모실 때 의당 우리 안에 벌어지는 일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통회하는 일이다. 마치 귀한 손님을 영접하기 전에 청소부터 하는 것처럼, 회개란 거듭남의 첫 증거이고 천성을 향해 가는 첫 발걸음과 같다. 그때부터 우린 성전에 서는 사람들이다. 교회를 다니고 각자의 성경을 들고 서는 것은 앞서 몸의 일이다. 몸은 마음보다 다루기 쉽다. 마음은 갈등하고 회의하고 망설일 수 있다 해도 몸은 의지적으로 행할 수 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곧 마음이 먼저인 것 같으나 몸에 따라 마음도 달라진다. 공부를 많이 한 친구들의 경우 죽어라 하고 그 몸을 책상에 앉힌다. 글을 쓰는 친구의 경우 정해진 시간에는 책상에 앉혀 자신의 손에 연필을 쥐였다. 나는 바울이 왜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각오로 하지 않고 몸을 쳤을지, 그리 이해한다. 내가 새벽에 눈을 뜨면 죽기 살기로 내 몸을 가누어 교회로 가져오는 것과 같겠다. 어떤 날은 어디가 아파서 끙,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때도 ‘억지로라도’ 그리 몸을 가눈다. 교회로 나와 노트북을 열고 오늘 정해진 말씀을 읽고 되새기며 글을 쓴다.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럴 몸 상태가 아니다. 어제는 꼬박 두 시간을 서서 성경을 읽고 글을 썼다. 허리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였다. 그러다 훅, 하고 어떤 불안이 일면 서너 알의 각기 다른 종류의 안정제를 먹는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는다. 응급으로 병원에 가야 한대도, 친구와 이른 새벽에 낚시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해도… 먼저 몸을 교회로 이끌고 말씀 앞에 세우는 일이 우선이 되었다.

 

회개가 인생의 전환이라면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은 순종의 기본자세이다. 생각 좀 해보고, 다시 마음을 좀 추스르고… 하는 따위로 멈출 수 없다. 이를 시인은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2).

 

이는 가장 우선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명령이다. ‘너희 손을 들고’ 즉 우리가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든다. 여기에 송축이 가해지면 찬양이 된다. 그러기까지 먼저는 두 손을 드는 일, 자신의 의지로 하던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든 것을 내려놓고, ‘두 손을 들고’ 성전에 서는 일. ‘보라 밤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동기 목회자들의 ‘생각 중’이 나는 늘 아쉽다. 망설임과 주저함은 생각하기를 통해 행동하기를 미룬다.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제 아이들이 학교에 막 들어갔고, 아직 월세도 면하지 못한 상태이고, 그러다보니 무슨 말 끝에 ‘생각이 많아요.’ 하면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다. 의외로 생각해서 이루는 일은 없다. 누구보다 나도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나름은 신중하고 나름은 더디다. 섣불리 판단하고 추진하지 않는다. 그런데 돌아보면 생각 중에 해야 할 일을 한 게 없다.

 

우리의 신앙, 천성으로 향해 가는 길에서는 생각하기보다 행동하기로 결판이 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렘 26:2).” 저로 ‘성전 뜰에 서서’, 이미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주가 하신 말씀을 전하라고 한다.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3).” 그건 하나님 생각이지, 여태 보고도 또 그런 말씀을 전하라 하시는 것일까? 예레미야는 생각이 없었을까? ‘잠깐만요, 주님!’ 하고 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행동하기를 미루지 않았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뚱딴지같은 말씀이신가? 하나님이 지금 뭔가 착각을 하신 건가? ‘잠깐만요, 주님!’ 하고 아브라함은 생각 좀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혹은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저는 행하였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 나는 종종 이와 같은 미친 짓 같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려 생각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마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 하나님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신다. 이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134:3).

 

앞서,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2).

 

하심을 두고 나는 마음이 복잡하였으나 받아들였다. 오늘 예레미야의 심정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저 기계적으로, 시키니까 시킨 대로 움직이는 게 순종이 아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26:4-5).” 정황상 저들은 이미 성전에 모여 예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가서, 그 ‘성전 뜰에 서서’ 외치라니!

 

가끔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는 저가 한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 덧붙여 말할 때 열에 아홉은 듣지 않는다. 가까웠던 사이부터 멀어진다. 내가 좋아하고 많이 의지하였던 동기 내외들이 모두 사역자라, 이도저도 아닌 일에 미적거리다 저들 나이가 벌써 마흔이 넘었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투신하라는 것이고, 그 하나로 개척도 당부하곤 하였다. 은퇴한 목사내외도 아니고, 아직 젊은데 가족예배로 모이다니, 또는 나이가 이제 가득한데 여전히 파트로 교회 일을 하다니. 주의 종이란 기능직도 아니고 직업적인 종교인도 아니다. 하여 이런저런 말을 더하자 더는 듣기 싫어한다. 나름 산다고 사는데 왜 저러나, 싶은 모양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이러기가 쉽지 않다. 헤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사이가 틀어지기 십상이다. 더욱이 저도 믿는 자이고 주의 일을 하는 자이면 누구의 어떤 말에 ‘소신껏’ 하려는 자기 생각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목사의 경우 이곳에 와서 책들을 보고 ‘교회로 독서방’처럼 운영하려 한다는 말을 했었다. 나는 반대로 더는 글방을 안 하고 교회로만 온전하려한다고 에둘러 말하였다. 더욱 독서법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속독보다 정독을, 많은 책을 읽히기보다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결과적으로 내 말은 헛되었고 저는 일주일에 두 권 이상 읽을 수 있는 무슨 수법을 개발했는지, 그 뒤로는 얼굴보기도 어렵게 됐다.

 

오늘 예레미야는 오히려 말씀을 전하고 죽음에 처하는 상황이 되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렘 26:8).” 말이 쉽지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한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10-11).” 저들의 의견이 합당하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예레미야는 전한다.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13).”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14-15).”

 

이는 무모함인지, 무식함인지…. 저들이 죽이려 하자, “그러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하며 그때의 일을 떠올렸고(17-18). 그때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19).” 하고 또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20-21).” 하여 설득에 나서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22).”

 

이야기의 전개와 오늘 내게 묵상하게 하시는 의미와 어제 읽었던 시편 134편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와 같은 말씀에 더욱 주목하게 하신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26:1-2).

 

다윗의 기도를 웅얼거리며 따라한다. 시편의 세계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 전적으로 주께만 의지하는 것으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3, 7).

 

나로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그러할 때에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3).

 

더는 돌아가지 않기를, 주저하며 망설이지 않기를. 우리로 송축하라, 송축하라 하실 때는 복을 명하시기 위함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134:3).

 

창조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살아갈 때에 소유할 수 있는 행복감이 복이다. 시편 1편과 128편과 오늘 본문 26편에서 밝힌다. 나로 평탄한 길에 서게 하실 것이고,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그럴 수밖에 없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1-2).

 

그러므로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곧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이는 생각하기가 아닌 행동하기로, 그리 행하였을 때 얻을 복에 대하여 나는 이제 확신한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