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예레미야 25:5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시편 25:8
오늘 예언은 여호야김 4년 곧 바벨론의 1차 침략이 있기 직전인 B. C. 605년에 선포되었다. 앞서 그 뒤로 이어지는 예언들이 먼저 수록되고 뒤에 이 내용을 담은 것은 예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열방에 대한 심판(15-38절)은 하나님의 선민 뿐 아니라 전 우주적인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알린다. 예레미야뿐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권유하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으나 저들이 듣지 않음으로 결국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일어날 것을, 그 원인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백성을 심판하시는 데 있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도 ‘나의 종’으로 사용하시고 저를 섬기게도 하셨다. 이후 선민을 폐망케 한 바벨론은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신다. 결국 바벨론은 B. C.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였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을 종으로 부르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바벨론은 실제 유다보다 약하나 전적인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선민에 대해 엄중한 징계를 통해 언약을 실현하신다. 이는 모두 구체적인 역사이고 사실이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1).” 이는 허구가 아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일련의 다양한 일들이 우연처럼 일어나지만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의 주관하심으로 허용된 사실이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오늘도 이는 그러하여서 우리의 한 날은 심판이 연기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미뤄진 한 날이다. 이를 바울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곧 이와 같은 날을 허투루 여기거나 악의적으로 생각하여 설마, 하는 경우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이 은혜의 한 날이 헛되지 않기를. 오늘은 엄연히 구원의 날임을,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꾸준하게 이와 같은 경고음을 낸다. 예언의 말씀을 듣게 한다. 여러 선지자를 보내셨다. 오늘 본문 4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하심이 오늘 우리의 실정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같이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이에도 이와 같은 말씀에 한 사람은 두려움으로 주를 경외하고 한 사람은 농담으로 듣고 만다. 이 여실한 차이에 대하여는 불가항력적이다. 어찌 강제할 수가 없다. ‘꾸준히, 끊임없이’ 주는 그때마다 종을 세워 사람을 보내셨다. 이를 알려 회개하게 하셨다. 그러나 듣지 않는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 3:18-19).”
그러므로 앞서 듣고 이를 깨달은 이나 끝내 들으면서도 이를 무시하는 자이거나 모두에게는 책임이 있다. 이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오늘 아침 나로 말씀 앞에 세우시고, 나를 돌아보고 내게 맡기신 이 귀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신다. 나 혼자 듣고 마는 이야기도 아니고 깨달아 혼자서 황홀한 감사에 도취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러하셨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종종 우린 이와 같은 경험을 한다.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글로 쓰고 혼자 도취되어 여러 번 읽기도하면서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과 동시에 일상의 무게를 일깨우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다 말고 훅, 하는 어떤 불안이 감돌면서 안정제를 삼킨다. 나의 이 이율배반적인 몸의 반응과 마음의 일 앞에서 나는 내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매번 경험한다. 누구 말처럼 주의 일에 헌신하는 데 있어 자신의 약한 육신이 또는 마음이 그 어려움으로 저항한다. 어떤 이는 쓰러지고 어떤 이는 기력을 다하지 못하고 금세 피로를 호소한다. 곁의 사람들은 이를 현상만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렘 25:5).”
먼저는 자신을 돌아보고 후에 곁의 이들에게 이를 알게 하는 전파의 의무가 우리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므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거룩한 부담감을 느껴야 한다. 남 얘기 듣듯 아무런 감동도 느낌도 없다면 그 신앙의 뿌리를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이를 묵상하여 마음에 둘 때, 동시에 생각나는 사람이나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곧 우리가 항상 주를 인정하고 범사에 주를 경외함이란 말씀이 내게 하시는 말로 들리고, 이를 듣고 누구를 또는 어떤 곳을 생각하게 되면서 어떤 부담감이 생기는 게 정상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멀리하고 듣지 않은 체 한다면,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 73:27).
이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8).
세상과 하나님을 다 같이 사랑한다 할 때,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이런저런 이유가 따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변명도 수도 없이 많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요즘 부쩍 이와 같은 갈등과 회피, 망설임과 주저함 사이에 끼는 것 같다. 아내를 대할 때도 자식들은 물론 아이들을 대하면서도 어떤 말을 전하여야 하는데, 너무 가까워서 또는 남이어서 주저하고 머뭇거리다 그만두기를 몇 번째다. 나의 고질적인 외면에 대해 나는 항상 씨름하는 것 같으나 번번이 회피한다. 가령 누구 생각이 계속 떠나질 않는데, 나는 미룬다. 전화라도 하고 만나야 하는데 그런들 뭐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나를 붙들고는 한다. 그럴 때면 내가 놓친 기회가 나를 책망하는 것 같다.
하긴,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4).” 그래서 보면 가족 목회가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이를 알면서 나는 철저하게 같은 설교를 사용하지 않는다. 단 한 명 또는 가족들뿐이라 해도 설교원고를 정해진 분량 이상으로 작성한다. 그러는 동안 쓰고 또 고치고, 쓸 걸 찾고 또 참고하는 동안 내가 먼저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기대한다. 말씀을 쓰거나 작성할 때도, 이를 바탕으로 누구에게 들려주고 전파할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나를 다루신다.
졸음이 덜 깬 걸음으로 교회로 올 때, 말씀 앞에 앉아 쓰라린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성경을 읽을 때, 같은 시간 같은 동선을 따라 나를 규칙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이를 때론 나의 나 됨을 쳐서 복종케 하는 일임을 안다. 내가 아는 나는 마음대로였다. 좋게 말하면 자유로웠고 나쁘게 말하면 주먹구구식이었다. 누구보다 그런 나의 기질을 앎으로 목사가 되면서 나는 이를 복종시키는 데 꽤 어려움을 겪은 것 같다. 그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나는 바울의 이 심정을 알았다. 또한 주님의 무서운 경고의 말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나는 이 비유의 말씀이 무섭다. 기껏 믿는다고 믿고 살았는데,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실상은 그게 나의 착각이었고 신념을 오해한 것으로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하신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고 두렵고 무섭다. 그게 나는 아니라고 내 스스로 장담하지 않는다.
오늘 유다의 실정은 저들도 믿는 자요, 근본부터 선민의식으로 살았던 자들인데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등한히 했다. 하여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5:7).” 이게 과연 오늘의 나와 무관한가? 믿는다고 믿는 자로, 혹은 목사로 산다고 자신의 믿음을 자신하고 특정할 수 있겠나? 과연 그래도 될까? 일상은 사느라 사는 여느 안 믿는 자들의 열심과 선행보다 못한 삶이면서도… 과연 아무런 부대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자신 있게 말씀 앞에 설 수 있나? 이를 말씀은 외식하는 자라 하여,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하여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16).”
자기만족, 자기상을 이미 받고 사는 사람들의 결국이 오늘 본문을 가득 채우고 있다.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 떼의 인도자들아 잿더미에서 뒹굴라 이는 너희가 도살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이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렘 25:34).”
하여 우린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5:1-2).
주가 아니시면 우린 무엇으로 살까?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3).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4-5, 8).
이에 주를 온전히 바람으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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