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전봉석 2023. 5. 28. 05:11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예레미야 24:2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24:1

 

 

 

다양한 형태로 선민에 대한 심판이 예언되고 있다. 그 원인과 결과를 지속적으로 상정하여 말씀을 전하시는 뜻은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하심일 텐데 오늘은 두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되고 있다. 시드기야 시대(B. C. 597-586) 말기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바벨론에 항거하고자 한 데서 주어진 경고이다. 605년과 597년에 각각 한 차례씩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은 유다를 침공하여 사람들을 인질로 데려갔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하나 저들은 이웃 나라와 애굽에 협조를 구하여 항거했다. 이때 예레미야의 권유로 항복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있다.

 

이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한 광주리를 보이신다.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2).” 이는 하나씩 그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하고 좋은 무화과에 대해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5, 6-7).” 하고 그 뜻을 알리신다.

 

그러나 나쁜 것은 아주 나쁜데,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8-10).” 그들이 당할 결국에 대해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끌려간 이들이 힘 없고 빽 없는 이들이었다면 끝까지 남은 자들은 힘 있고, 지킬 게 많은 가진 자들로 주의 뜻에 반항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된다면 그게 어떤 이유 때문이든지 포기해야 한다. 자식으로든지 재산으로든지 자신의 꿈과 신념을 위한 것이든지 심지어 공적인 일(?)로 인한 것이라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우선할 수 없다. 가령 다윗은 자신의 의지로 구축한 나라의 상태를 알고자 인구조사를 하였고, 이를 임의로 한 데 대해 자책하고 회개한 적이 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 24:10).”

 

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던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것과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하는 경우는 엄연히 다르다. 그에 따른 대답은 에스라서에 담긴 내용으로 대신하면,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에스라 8:22).” 곧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여 그 뜻을 따라 하느냐, 자기 뜻에 따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미묘하나 엄청나다. 둘이 똑같이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 같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느냐’ 하는 문제와 자신의 신념과 목적으로 하나님을 구하느냐의 일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와 나중의 차이, 이 놀라운 간극은 적어도 그 모양은 같은 것 같으나 마음은 전혀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르시길,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게 참 쉬울 것 같지만 마음을 두고 해보면 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제로는 어렵다. 마음으로는 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결국 우리의 열매는 어느 줄기에서 나오느냐 하는 데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로 갈리는 것 같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3-44).”

 

하여,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결국은 그 중심을 보신다는 것인데,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6-7).” 우리로서는 이를 분간하기 어렵다. 같은 하나님을 같이 바라고 구하는 것 같으나 그 중심이 자신의 요구와 욕망을 위하여 구하는 자가 있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자의 가는 결국은 다르다. 고로,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결국 우리의 고난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다. 같은 고난인데 실제 증거하는 바가 다르다. 오늘 본문은 이 둘의 차이를 광주리에 담은 두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같은 형편의 광주리 안에서 같은 종류의 나무인데 어째서 하나는 좋은 나무로 하나는 나쁜 나무로 나뉠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0-12).

 

아이러니하지만 우리의 죄성은 고난이라고 하는 리트머스종이를 통과할 때 걸러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가령 나는 요즘 누구의 일을 주시하고 있는데 저의 난처하고 어려운 일이 도리어 반전이 되어 저와 그 처와 아이까지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그 가운데 동생은 필리핀 사역이 엉뚱한 결과로 묶여 한국에 남게 되었고, 맡았던 아이의 고소 건으로 재판은 진행 중인 가운데 1차가 진행되면서 도리어 무죄를 주장하는 쪽으로 전환하였고, 그 일로 아무튼 목회가 중단된 줄 알았는데, 처한 상황에서 가까운 공장에 다니고 그 처와 아이도 휴학을 하고 다른 공장을 다니며 한국 생활에 기반을 삼고 있다. 그러는 동안 일은 연속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뭐지? 싶었던 일이 드러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때마다 드러난다.

 

이를 구구절절 글로 옮길 수 없으나 우리네 생활이란 게 그 소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가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게 아닌가? 어제 동생은 전화를 하여 고소당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려, 쫓겨난 줄 알았던 공장에서는 오히려 부장 대우로, 해썹(HACCP) 팀장 과정을 이수하여 더욱 그 입지가 뚜렷해지고, 궁여지책으로 사모와 아들이 다른 공장을 다니던 터에 그 공장이 이천으로 이주하면서 두 시간씩 왕복으로 출퇴근하는 게 오히려 동생 공장에서 모셔가게 된 셈이 되고….

 

나는 오늘 말씀에서 고난을 겪으며 갈리게 되고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실제 우리 일상에서 드러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흔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 재앙 같고 근심이었던 것이 오히려 복이 되는 과정으로 우리 믿는 자의 삶이란 게 이런 것이 아닐까?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9-10).

 

이를 아는 자는 그 삶에서 경험이 있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겔 37:12).” 곧 우리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시다.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은 선을 이루시기 위한 것으로 이를 그리 받으면 좋은 무화과나무로 그리 받지 못하면 나쁜 무화과나무로, 한 광주리에 두 결국이 담긴다. 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9-10).”

 

이 놀라운 사랑의 역설, 하나님의 역동적인 활동이 우리로 감사의 진실을 알게 한다. 내 뜻대로 이루어진 어떤 결과로 드려지는 게 아니었다. 도저히 감사가 나올 수 없는 지경에 감사로 드려지는 신앙,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2-23).” 그런 상황 속에서, 요셉은 노예로 있던지, 억울하든 어쨌든 감옥에 있든지, 하나님만 바라며 그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 오죽하니 노예로는 모든 집안 대소사를 관리하는 노예로, 감옥에 갇혀서는 간수장이 모든 걸 맡기는 자로. 저는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어떤 상황속에서든지 묵묵히 수행하였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포로로 붙들려간 이들을 주가 돌보심이 약속되고, 남은 자들은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수난과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오늘 본문에서… 모든 성경은 우리 일상의 본보기다. 표준이 된다. 기준이 되어 좌로나 우로나 흔들릴 때 우리 신앙의 중심을 잡게 한다. 어린 다니엘이 보여주었던 신앙도,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그런 상황에서 주만 바란다는 게 결코 아무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린 잘 안다.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요령껏 자기 뜻대로 하여 당장은 안도하고 괜찮을 줄 아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결국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들이다.

 

그러니 억울하게 법정에 서야 한다 해도, 공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막말을 들으면서도, 이내 변호사는 나서서 무죄주장을, 사장은 나서서 부장으로 해썹팀장으로 …… 이 모든 것은 저들이 한 게 아니다. 악한 자들이면 어떻고 그곳이 비참한 나락이라 해도 어떻겠나?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일은, 앞으로의 결과에 대해서는 주께 맡기고 다만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들이었다. 훗날에 우린 이를 증언할 자들로 세워질 것이다. 일련의 일과 성경의 일이 하나 될 때 나는 감복한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아집과 고집의 머리 숙이고, 찬양과 영광으로 머리를 든다.  염려와 근심으로 닫힌 문을 연.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73:18-19).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M. 스콧 펙의 글처럼 우린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 31:1-3).”

 

이에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왕 되심이 어떠한가를 찬송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4:1).

 

이는 마땅한 의무이며 권세이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줄 수 없는 평안으로,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2-4).

 

이에 나의 삶을 점검하게 하신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는 오늘도 유효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말씀의 핵심이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5-6).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7-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