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2-13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 그 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라 권한다. 거짓 선지자를 경계하고, 70년 후 하나님의 약속대로 귀환할 것을 알린다. 그 와중에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하고 사람들이 이에 현혹되는 것을 보인다. 결국 유다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저들을 여전히 따르고 그에 따른 저주와 허구성을 밝히고 있다. 결국 70년의 포로생활은 연단의 시기였다. 죄를 뉘우치고 거룩하게 거듭나야 한다. 그런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은 조속한 귀환을 예언하며 백성의 마음을 현혹하였다. 이와 같은 소망이 듣기에 좋은 듯하나 죄를 참회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훼방한다.
오늘에도 여전하여 희망을 주고 거짓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듣기에 좋은 듯하나 우리 영혼을 고정시키고 죄를 뉘우치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당장의 소망과 좋은 위로가 유익한 듯하지만 실은 환난이 주는 유익을 저해한다. 고난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거룩을 상실하게 한다. 그러할 때 우리가 이를 분별하는 것은 말씀이 근거다.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6-27).” 곧 말씀으로 그 발걸음을 밝혀야 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시 119:105, 107).
이 말씀을 바로 알고 그 길에서 어그러지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여 모든 선택과 방법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8-9).” 곧 일상이어야 하고 늘 그리 행하는 걸음이어야 한다. 자칫 거짓은 틈만 나면 우릴 흔들고 듣고 싶은 말과 원하는 소원으로 마음을 빼앗기게 한다. 그러므로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몸이 가면 마음도 간다. 마음은 백날 먹어봐야 소용없다. 그래서 바울은 몸을 쳐서 마음을 다스렸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때로 우리에게 더하시는 징계는 묵묵히 수용하고 순응하는 게 지혜다. 오늘 본문 5절 이하,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5-6).” 뿐만 아니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7).”
곧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의 골을 개간하여 살아야 한다. 정복해야 하고 다스려야 한다. 이는 처음 사람 아담에게도 더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비록 오늘 이 현실이 바벨론에 끌려온 포로 생활과 같다 해도 이를 허용하시고 그리 조성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펴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잠 3:11).” 이 징계로 우리가 영원한 정죄하심에서 구원을 얻는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정죄는 영원한 형벌을 감당해야 한다. 징계는 우리로 순종을 배우게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물론 저들의 불순종으로 인함이었으나 그와 같은 광야의 여정이 저희로 복종하는 삶을 연마하게 하였다. 이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0-12).
시편의 통찰과 그 세계관은 오늘의 기타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어떤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에 함몰되어 새로운 희망과 얼른 벗어나고자 하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이유와 목적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포로로 잡혀간 그곳에서 순응을 배우라 하신다. 삶을 연장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평안을 터득하라 이른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5-17).”
고난과 역경을 벗어나는 게 능사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여지기를…. 어느 사회학자의 말처럼 ‘전문가란 하기 싫은 일에서 더욱 노력하여 그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는 데 따른 어려움이 있다. 누구라도 아무렇지 않은 삶은 없다. 소소하여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그러한 괴로움으로 때론 사는 게 지옥 같다. 그러나 이 지옥을 통해 천국을 사모한다. 지옥에서 천국 생활을 배운다. 송축이 한 밤에 이루어진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1).
이번 주일 본문을 다루고 다듬고 다시 작성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하면서 나는 그 의미가 참 깊고 귀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보라 밤에’ 곧 우리 생에 있어 밤이 없는 하루가 어디 있던가? 밤과 낮이 반복되듯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곳, ‘성전에 서 있는, 우리는 주의 종들이다.’ 성경은 안 믿는 자의 말씀이 아니라 믿는 자들, 주의 종들을 향한 소리이고 언어이다. 우리가 그러한 때에 주의 성전에 있어서 주의 종들인지, 주의 종이어서 성전에 서 있는 것인지… 때론 왜 나 같은 자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왜 구원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그리하여 ‘보라 밤에’ 비로소 나는 송축을 알게 된다.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 경사를 배운다? 주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우리로 이 땅에 살면서 땅을 일구고 가정을 꾸려 자식을 낳고 살며, 나아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간구함은 내가 살아야 하는 평안을 위해서도 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그럴 수 있는, 그래야 하는, 그와 같은 능력이 수고와 고단함과 어려움 속에서 단련된다. 나는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때론 하루의 시간이 너무 어렵다. 몸을 이리 가누고 저리 다루면서 어르고 달래다 보면 지친다. 결코 나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 그리하여 사느라 사는 게 일일 때는 어떤 서러움이 또는 분노가 내 안에 꿈틀거리지만 동시에 주가 주시는 평안은 배가 된다. 상대적인 것이라 누구에겐 대수롭지 않은 행복이다. 진통제를 줄이거나 늘리거나, 안정제가 많아지거나 줄었거나… 나는 이상의 세계를 소망한다. 70년 후의 귀환을 꿈꾸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고 산다. 오늘 말씀에서도 이 부분에서 안도하였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 29:5-6).”
주신 상황 속에서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7).” 거짓 선지자들은 당장의 고달픔과 역경으로 피폐한 마음을 흔들어서 곧 귀환할 것과 다 잘 될 거라 이르며 듣고 싶은 말과 거짓 위로로 섞어놓는다. 이에 바울은 세상과 천국 그 사이에서 우리의 ‘낀 날’들을 역설하였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곧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122:6-7).
어떤 어려움, ‘보라 밤에’ 성전에 서 있는 자로 살아가기. 그에 따른 의지적인 행동은,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2).
분명 억지로가 아니라, 우린 손을 들었다. 성소를 향해 손을 들었다. 손을 드는 행위는 항복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경배와 찬송을 올려드리려는 몸짓이다. 더는 저항할 의지가 없음을 내포한다. 내 의지로 하려 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은 결과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그 가운데 구하여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29:1-2).
하나님은 나의 유일무이한 존재이심을 인정하는 일, 찬양과 경배 곧 우리의 송축은 그 중심에 있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때론 여러 어려움이 속수무책으로 몰아쳐온다. 그와 같은 중에서 우린 평소 간절하지 못했던 주를 바란다. 고난의 의미는 평소 미처 가닿지 못하였던 간절함의 지점에서 주를 만나게 한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가정마다 개인마다 닥쳐올 때, 우리 안의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속삭인다. 괜찮아, 별 거 아냐, 다 잘 될 거야! 오늘을 즐겨, 행복하면 그만이야. 하는 식으로 여러 방안을 제시한다. 누구는 그리하여 여러 개의 모임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상심할 수 있는 마음을 정신 못 차리게 오락으로 또는 유흥으로 끌어간다. 곧 귀환하게 될 거야,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하는 듣기 좋은 말들. 위로가 되는 각종 행사들…. 그로 인하여 고난은 무뎌지고 고통은 가벼워졌다 사라진 듯하다. 그것으로 더하시고 했던 애통함으로 주를 찾을 기회가 사라졌다. 미처 취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되는 고난은 다들 그러고 사는 일개 그럴 수 있는 일로 변질된다. 뭐, 그게 이 땅에서가 전부라면 그리하는 것이 낫겠지만….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3-4).
이를 듣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정신 팔려 살고 있지는 않은지?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7-8).
그런 와중에 과연 우린 고백할 수 있을까?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우린 분명히 ‘보라 밤에’ 주의 성전에 서야 한다. 손을 들고 송축해야 한다. 그러함으로 얻는 평강이 있었으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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