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전봉석 2023. 6. 3. 04:35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레미야 30:22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30:11

 

 

 

하나님은 주시는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 선민의 귀환과 회복은 서론이며 결론이다. 환난을 당하나 그 환난에서 구원함을 받을 것이다. 형벌은 구원 회복을 전제로 한다. 죄에 대한 징계는 필연적이나 인내로 감당하는 것도 가르치신다. 보응과 회복은 예언의 사실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심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의미 있음을 알게 한다. B. C. 586년 유다는 멸망한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이뤄진 것임을 알게 한다.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킬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오늘 우리가 처하는 모든 상황은 주가 함께 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어떤 어려움을 두고 믿는 자가 더하는 것 같아 안 믿는 자나 덜 믿는 자의 눈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8, 11).” 곧 우리의 어떤 어려움이 없으면 죽은 자이거나 아들이 아니다! 마치 아무리 무리지어 있어도 내 아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어떤 몹쓸 자리에서 내 아이는 어떻게든 건져내는 것 같이 징계는 사랑이다. 당시는 즐거울 리 없어도 그것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우리에게 더해지는 어떤 어려움으로 힘에 겨워하다가도 그것으로 주의 사랑을 바라게 한다. 마음이 심란하였는데, 친구가 성경 읽기를 시작하였고 전날에는 새벽 세 시까지 읽어야 했다고 하였다. 몇 장을 읽기에 그런가 물었더니 인물과 사건의 개요를 이해할 수 없어 써가면서 읽느라 늦어졌다고 하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하고 끊었는데 오후 내내 그의 성경읽기가 마음에 걸렸다. 오후께 다시 전화하여 일주일에 한 번 시간을 정해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읽다 모르겠는 부분을 메모했다 질문하는 것과 그 읽은 부분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자고 하였다.

 

어떤 일은 그렇듯 마음에 남아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하다 가장 좋은 해결점을 찾게 하신다. 저는 자기 의지와 지식으로 읽으려 하고 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씹고, 마셔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줌으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는 저 친구와 이런 대화나 이런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 희한하고 신기하다. 우린 서로 그러는 사이가 아니다. 세상 좋을 대로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처럼 주를 사모하게 되었을까? 저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아직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된 오늘의 상황은 희한하게 여긴다. 하나님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되었다.

 

은총은 회개 후에 온다. 오늘 15절,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 징계로 회개의 기회가 온다. 회개로 주의 긍휼하심을 더한다. 친구의 열심은 아직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교회에 열심이고 교회에서 하는 성경읽기를 따라하려는 의지가 곧 주가 주신 은총인 것을 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할 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나도 그러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의 삶은 말씀을 바탕으로 한다. 성도나 자녀는 그래야 한다. 오늘 2절 말씀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이에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에 이르러 나에게 들려주시기 위한 성경이 되어,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3).” 말씀은 이루어지고 이루어지기까지 우리가 겪은 징계는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게 한다. 하여,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나는 친구가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과 이를 더 이해하고자 그 이름들을 적어 계보를 살피느라 새벽까지 그러했다는 말이 신기하였다. 어쩌면 그때 고넬료를 떠올렸을까? 베드로 보내신 것을 생각했을까? 내 안에 저의 알고자 하는 마음에 성경을 풀어 설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해야 한다는 어떤 확신이 들어….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7:31).

 

우리 가는 길에 어려움이 없다는 게 아니다. 도리어 강한 바람으로 배는 더 빨리 전진할 수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3:1-3).”

 

늙으신 장모는 저녁에 같이 성경을 나누며 예배를 드릴 때 자꾸 까먹는다고 염려하였다. 나는 장모에게 우리가 엊그제 무엇을 먹었는지 까먹었어도 그 음식이 이미 몸에 들어가 각종 영양소를 공급한 것과 같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자체로 주의 은총은 우리 안에서 배아 한다고 알려주었다. 어느 음식이 뼈로 가고 피를 돌게 하는지 우린 일일이 알지 못한다 해도, 우리 몸의 소화기능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듯이 우리 심령에 주의 영이 이 일을 담당하신다.

 

이때 우리가 말씀을 분별하는 것은 일종의 본능적이다. 자녀이면 가령 엄마의 학벌이나 그 계보나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한다 해도 여러 여자들 가운데서 엄마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는 아이의 뇌리에 박힌 어떤 회로, 본능적으로 우리가 주를 찾고자하는 마음이 발동하는 것과 같다. 차츰 알아도 될 일을 끙끙 앓듯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아이는 엄마의 다른 이유로 그 품을 찾는 게 아니다. 엄마니까 됐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는 데는 사랑의, 은혜의, 긍휼하신… 하는 수식어에 의해 하나님을 국한지어 사랑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시니까 됐다.

 

그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하는 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이와 같은 고백이 그저 어쩌다 튀어나온 게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창 1:14).” 우리의 일상과 그에 따른 여러 역경과 환난은 그의 조성하심에 따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렘 30:8-9).”

 

궁극적으로 그러하게 하시려고,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나는 오늘에 이르러 하나님이 나로 혹은 친구에게 그와 같이 역사하심을 안다. 나아가 누군지도 모를 이와 대화를 하고 상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전하고 있을 때면 그때의 내가 내가 아닌 듯하다. 우린 때로 낯선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열심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오늘 나 된 것은 내가 한 게 없다. 감사하면서 송구하게도 세상적으로 어울리던 친구들 하나하나가 주께로 함께 돌이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마주하는 일은 기이하다.

 

동생이 필리핀에서 돌아와 연타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주가 이루실 이 땅에서의 저의 역할을 궁금해 한다. 비록 안타까움이 또는 어떤 염려가 앞서는 것은 사실이지만 재판에, 일거리에, 또 병환으로 고통 중에 있는 모습을 보면서 주가 이루어 맺게 하실 열매가 무엇일까 기대한다. 이때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이는 간단하지가 않다. 그래도 내가 목산데… 선교 일로 수십 년을 헌신했는데… 하는 자부심을 내려놓기까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그 보루는 규정에 따라 사람이 살게 되리라(렘 30:18).” 주가 회복하실 것이다. 그리하여서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19).” 어떤 단계,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알게 하신다. 우리의 선입견 혹은 편견을 깨뜨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2).” 주가 만드신다. 그리 행하신다.

 

하여,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엡 5:29-30).”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0:1-2).

 

우린 우리의 역경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알게 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이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법을 새로 배운다. 또한 누구를 위하고 저를 섬기는 일에 처음인듯 새로이 한다.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어디가 아프다. 어떤 우려와 염려가 앞선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앞서서,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하나님의 하시려는 바,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4).

 

오늘 시편은 길을 트며 외친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5).

 

이 놀라움이 우리로 춤추고 노래하게 한다. 오늘의 시련이 또는 고난이 우리로 주의 손을 잡게 한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하여,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그렇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0-11).

 

그리하여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의 남은 날이 영생의 시작인 것을 확신하면서,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