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예레미야 38:19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 38:21-22
죽음을 앞두고 조롱을 두려워한다. 거듭되는 설전을 보면서 그 원인을 알겠다. 남이 뭐라 할까 하는 마음이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벨론에 항복하기에는 체면이 안서고, 설령 그리하여 끌려갔을 때 먼저 간 유다인의 조롱거리가 될까 두렵다. 시드기야 왕의 마음을 알겠다. 대수롭지 않는 듯하나 수치심은 죽음보다 무겁다. 순종에는 고난이 따르나 이면에는 주의 보호하심과 안전이 있다. 축복과 생명이 자리한다. 수치 앞에서 이를 돌아보기란 쉽지 않은 듯하다.
오늘 본문 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어찌 보면 저들의 항거와 투쟁은 당연하다. 하나 이미 그리 정하신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가 여러 차례 말하여 경고하고 예언하나 저들은 이를 선동으로 안다.
우리에게 근심은 사는 동안 벗길 수 없는 살갗과 지울 수 없는 지문 같다. 그러나 근심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있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어찌 하면 주를 더욱 온전히 섬기고 바랄까? 하는 마음에서부터 교회를 위하여 같은 성도의 생활을 두고 하는 근심은 그 마음에 주의 이름으로 더욱 간절하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울라 한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9-10).” 하여 지혜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이는 우리의 근심을 승화시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하여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이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이 땅을 살며 어떤 어려움이 또한 악함을 마주하고 우는 일은 당연하다. 성도로 살면서 세상의 여러 분함을 두고 애통해하지 않는다면 그 심령이 오히려 마비된 게 아닐까? 하여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복을 말씀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3-4).” 세상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는 가난과 그 심령으로 애통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1).” 하여 성도의 삶이 고달픈 것 같고 안 됐다.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오히려 높이 들고 눈을 들어 보라 하신다.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속죄하며 자복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8-9).” 저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것을 다시 쳐다보라 하시는 게 너무 잔인하신 명령 같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장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일과 같다.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나 그 일의 원인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두 손을 들고 울부짖을 수 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오늘 본문은 당시 대부분의 고관들이 친 애굽 정책론자들이었고 그러다보니 예레미야를 적대시하는 자들이었다. 저들이 세운 제사장들은 괜찮다, 평안하다 외치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부풀려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고 받들어 사람들을 휘젓고 있었다. 흔히 우리가 대세를 따른다는 말, 오늘 날의 민주주의니 다수에 의한 정치란 게 얼마나 사람 중심으로 모든 정책이 이뤄지고 저들끼리 싸우며 정치논리에 따라 좌지우지되는지 우린 잘 안다. 더러 교회에 이에 편승하여 정치화되고 보수를 내세워 오늘의 ‘예레미야’를 경계한다. 결국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저들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따르지 않는 것은 이목 때문이다. 체면이 그리 중요하고 수치심은 죽음보다 무겁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이를 잠언에서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는 아주 당연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재촉한다. 이를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아무리 대다수가 아니라 해도, 몇 명의 ‘예’ 하는 자는 있었으니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 1:18).” 곧 오늘 본문 7절부터 보면,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10).” 그야말로 알아주는 이 없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주의 종을 두려워할 줄 아는 데서 우리는,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2:24).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하신가를 안다.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오히려 억울하고 서러운 일을 당한다 할 때 주는 아신다. 하여 사도들은 가르치기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행 20:25).” 보면 그게 어려운 자가 어려운 자를 돕는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도울 줄 모른다. 자신이 없어본 적이 없어서 있는 자로 사는 데 익숙하다. 말로는 여러 미사여구를 구사한다 해도 저의 말은 거짓이다. 오죽하니 지혜자는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1).” 하물며 어려움에 처한 주의 종을 돕는 일에 있어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우리가 가는 나라, 믿음의 걷는 이 길 위에서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우리로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다는 일. 말씀과 현실 사이에 낀 채 갈등하고 있을 때 오늘 14절, 우리 안의 ‘시드기야’를 몰아내야 한다.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 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 저는 듣고 또 듣고도 여전히 갈등한다.
갈등은 답이 없다. 죽으나 사나 행동하지 않는 이상 여전히 같은 자리다. 하도 답답하여 여호수아는 외친 적이 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16).” 뭉개고 미루고 늘 수동적으로 망설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누구에게 예배를 권하고 예수를 전하면 늘 돌아오는 말이 나중에… 그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처지나 상황을 이해한다. 우리 안의 ‘시드기야’를 우린 늘 이해한다.
어쩔 수 없다. 아직 자녀가 어리고, 돈 들어갈 때는 많고, 거기에 줄줄이 모셔야 할 양가 어른들은 연로하였고, 하루하루 사는 데 지쳐 망설이는 일이 망설이는 일이 아닌 듯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스라엘은 그래서 광야 40년을 배회하는 동안 같이 애굽에서 나온 많은 이들이 죽어 모래 위에서 장사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것이다. 이러하듯 오늘에도 여전히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현실과 말씀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을 향해,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왕상 18:21-22).”
사백오십 대 일, 십 대 이, 다수 대 소수… 모두가 아니라 하는데도 말씀 앞에 굳게 서기란 참으로 어렵다. 모양은 그럴듯하나 독이 가득하다. 즉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오늘에 교회를 지키며 이를 이뤄간다는 일, 기업화되고 대형화된 교회들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을 오늘 시편으로 그 마음을 다잡는다면,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8:1-2).
설령 모두가 나를 멀리한다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면서 힘은 기도였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곧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4-5).
주께 아뢸 때,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우리 스스로 우리 죄의 짐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9-10).
우리로 주께 아뢰며 주를 신뢰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말씀을 의지함이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애 1:14).” 이에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18).” 그에 따른 고통을 앎으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5).
곧,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7-18).
우리로 주께 아뢰고 고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하심은, 궁극적으로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 하는 말씀으로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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