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전봉석 2023. 6. 13. 05:17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하니라

예레미야 40:4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40:16

 

 

 

안 믿는 자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하나의 메시지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의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와 유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사령관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2-3).” 물론 저의 표현은 ‘네 하나님’으로 나타났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과 이를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인정한다 해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사 52:5).”

 

우리가 주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그 신앙이 바르지 않을 때 곁에서 보는 안 믿는 자들도 다 안다. 그것으로 저들은 돌이킬 수있는 기회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하여 바울은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곧 우리의 표정, 행동거지, 사는 모습 등이 저들에게 맡아지는 냄새가 된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5-47).”

 

이와 같은 생활은 사명이다. 이는 선택이 아니다. 마치 고유의 냄새 같다. 믿는 자는 이상하게 티가 난다. 어쩐지… 하고 여겨지는 어떤 느낌이 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도 느부사라단 사령관이 먼저 예레미야를 선히 알아보고 후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호의와 특별한 대우는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할 줄 아는 데서 시작한다. 물론 저는 그조차 인정할 수 없는 이교도요 이방인이라 해도, 그와 같은 선처나 호의로 교회를 이루어가거나 주의 말씀을 전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길이 바르게 가는 것임을 알게 된다. 가끔은 신기하고 때로는 왜 내게 이와 같이 잘해주는지 의아할 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97학번으로 신학교 학부를 편입하여 공부하게 되었던 것도 순전히 어떤 이의 ‘유난스런 관심’에 의해서였다. 전혀 그럴 사이가 아닌데, 우린 그저 어느 동호회에서 서로의 글을 보고 ‘아는 사이’ 정도였다. 당시 나는 아버지가 목회를 하던 교회가 건축을 하면서 사기를 당하고 어떤 어려움으로 모두들 떠나고 몇 안 남은 성도들로 빚에 빚을 얹고 있는 처지의 교회로 환멸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저 항상 도망치듯 집 밖으로 맴돌았고 교회도 멀리하고 있던 때인데, 전혀 상관없는 어떤 이의 권유는 집요하게 나로 신학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럴 형편이 아니라고 피하고, 심지어는 대놓고 지금 처한 상황을 설명하며 지겨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겠지만 저는 그때 가장 다급한 의료보험체납을 해결하게 하였고, 자신이 모든 학기의 학자금을 대납하였다. 이를 덤덤히 글로 표현하기는 당시나 지금이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가 전혀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결국 신학학부를 마치고 마음을 틀어 나는 목회과정이 아닌 학위과정으로 선회하면서 목사가 되길 거부하다 그만두었다. 그렇게 매 학기마다 누구라도 선뜻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의 학비와 도서비를 저는 감당하였다. 그러다 내가 결국 목사 되기를 포기하였을 때 우리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이와 같이 말할 수 없는 어떤 관계 속에서 우리는 믿는 자로 사는 데 있어 도움을 받는다. 돌아보면 나는 엉망으로 살았는데 그때마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고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이상한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같이 믿는 자로써 그렇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종종 저들과 나는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그 가운데 뜬금없는 만남이고 사건이기는 하였지만 저의 도움으로 신학교로 편입하여 학부를 끝낸 것이 후에 09학번으로 신대원 목회자 과정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있었다.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하니라(렘 40:4).”

 

저는 적국의 사령관으로 포로들을 끌고 가던 자였다. 또한 저로서는 아무리 알고 있었다 해도 예레미야를 주의 종으로 인정하고 그리 선대할 이유는 없었다. 이와 같이 불가항력적인 은혜 혹은 ‘성도의 견인’에 있어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대해서는,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문득씩 턱을 괴고 앉아 주가 인도하셨던 나의 날들을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이 아니었던 것이 없다. 우연한 만남이었던 것 같은데 예비 된 만남이었고, 스쳐가는 사이였던 것 같은데 오랜 시간 사랑의 빚을 지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령 지진아에 가까운 나의 유년은 특수아동으로 분류될 정도였는데, 그때 만난 ‘어떤 아이’를 좋아하면서 편지를 쓰고 책을 읽고 같이 도서관에 다니면서 연애 아닌 연애 같은 시간이 나로 오늘에 이르러 이처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 줄이야. 앞서 여수 애양원 병원에 6개월 있을 때도 소경 장로님은 물론 어떤 간호사(?)의 남다른 호의는 어린 내 기억이 스냅사진 같은 추억이다. 나를 휠체어에 태워 그 언덕길을 올라 애양원교회로 자주 갔었다. 내 기억으로 저는 믿는 이가 아니었는데도 그렇듯 오래된 성전에 들어가 한참씩 앉아 있어주거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가서 하염없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던 것 같다. 나의 유년과 학창시절에 겪는 여러 상처나 앙금은 그와 같은 만남으로 어떻게든 해소되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이상하기만 한 만남, 어떤 사이, 무슨 일들이 나의 날들을 씨실과 날실로 잘도 엮여져 있는 것 같다. 주의 손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이에 의해 늘 공급되고 있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3-4).”

 

그래서였을까? 전에 나를 짓누르고 있던 어떤 억울하고 원통한 기억들이 오히려 이야깃거리가 되고 추억이 되어 감사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를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보면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내게 보내셨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학기가 시작하고 반을 바꿔야 하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도 무조건적으로 우리 편에 서주던 양호선생이 있었다. 결국 1층 여자 반에 편승해서 남은 학년을 마저 끝내야 할 때도 어린 게 뭘 안다고 반장아이가 그렇게 나를 챙겨주었다. 어른이 되고 아주 우연히 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뜻하지 않게 저는 어떤 목회자 가정의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교회에서도 자신의 직분을 충실하게 하는 집사였다. 초등학교 때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땐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서로 멋쩍게 웃음짓다 헤어졌다. 아무튼….

 

하나님이 우리로 이 길을 가는 데 있어 어떤 만남, 어떤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다루신다. 그리고 우리로 그와 같은 일, 주의 뜻하신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게 하신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 11:28-29).”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만남과 어떤 호의,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오늘 말씀을 읽으며 유난히 나의 여러 인연들, 고마운 사람들에 대해… 저들로 인하여 오늘에 되돌아보며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축복하게 된다. 이젠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혹시 어느 훗날 주의 나라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눌 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불현듯….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누구보다 이 시편이 가슴에 와 닿는다.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부모로 인하여 또는 유년에 겪었던 어떤 억울함에 있어서도 우리 믿는 자에게는 그와 같은 노여움조차 찬송이 되게 하시고 남은 노여움을 우리 안에 남겨두지 않으시는 은혜라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

 

바나바는 예수님의 70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눅 10:1).” 저는 예수님의 죽음을 목도하고 구브로 교회를 개척한 자이다. 권면의 아들, 위로의 아들로 불리는 바나바는 레위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이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행 4:36).” 저는 또 마가 요한의 숙부이면서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일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5-26).”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 지도자로 세운 이도 바라바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9:27).” 저는 훗날 구브로 살라미스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우연한, 그러한 필연적인 어떤 만남이 있다. 하나님은 그때에 적절한 사람을 세우시고 주의 일을 이뤄 가신다. 그러다 서로 갈라지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선한 만남이 있으면 선한 이별도 있어 잊힘으로 각자의 사명을 다하기도 한다. 우린 항상 답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나의 이러한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오늘도 계속되고 있음을 안다.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렘 40:6).”

 

어떤 만남이 우연인 것 같지만,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40:1-2).

 

그러는 과정에서의 어떤 사람, 또는 어떤 도움이 서로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것으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곧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3).

 

나로 나의 지난 날 저들에게 진 사랑의 빚으로 살아가게 하심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은연중에 저들에게 배운 주의 사랑으로 살게 하신다. 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8).

 

이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1, 13,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