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예레미야 41:4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편 41:12
왕의 장관으로 친족이었던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민족 유다를 위기에 빠뜨린다. 저는 그다랴를 살해하였다. 이는 세력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암몬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 “그에게 이르되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 하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믿지 아니한지라(40:14).” 이는 그 동기가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그다랴는 당시 유다 최고 통치자였으나 왕으로 불리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왕족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다윗 가문에서 난 자라야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왕족으로써 이스마엘은 그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 정복당한 유다로서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그다랴가 총독이 되어 다스리고 있었다.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렘 40:9).” 그런 와중에 이스마엘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다윗의 혈통으로써 왕족이 아닌 그다랴가 다스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명분으로 저는 결국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비록 바벨론에 정복당했으나 그다랴의 지도력으로 유다 공동체를 유지하던 것인데, 저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분분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경우도 그러했었다. 다윗이 더 높임을 받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에 저는 시기하고 질투하여 오로지 다윗을 죽이지 못해 안달을 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전개되는 사건은 끔찍한 인간의 내면의 결핍을 고스란히 밝혀준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그의 첫째 아들 가인은 첫 살인자가 되었다. 그때도 동기는 시기와 질투였다. 이 두 감정은 다른 모든 감정을 소멸시킨다. 오늘 이스마엘의 살인도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2-3).”
어쩌면 우린 처음 사람 아담 아래 하나님의 사랑과 단절되었다. 그것으로 사랑의 허기는 온갖 허무한 것에 집착하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짓도 불사한다. 물론 그러면서도 사랑이라 이른다. 우리 사랑의 방식은 비틀리고 자해적이 되었다. 사람은 스스로 사랑을 할 수 없다. 이를 다룰 능력을 상실했다.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사랑의 감정은 망각되어 자기만족을 그리 착각한다. 사랑이란 명분으로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상처가 된다. 자칫 친절한 타인만 못한 사랑을 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유발되는 사랑이 아니고는, 모든 사랑은 생채기를 낸다. 공교롭지만 이는 어느 특정한 사람의 경우에만 그런 게 아니다. 유순한 자는 저의 우유부단함으로, 올곧은 자는 저의 강인함으로 상대를 찌른다. 사랑의 상실은 하나님을 잃는 결과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8, 16).”
그러하여,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시 144:2).
이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어쩜 우린 상실의 시대를 살면서 사랑이 서로를 겨누는 총기가 되는 줄도 모른다. 누군 남다른 자식을 두고 그 사랑이 깊다. 하여 우울증에 시달릴 정도로 자식을 사랑하나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원망과 근심에만 시달린다. 아이도 그런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귀하다고 하면서 싫어한다.
하필, 어제는 가정예배를 드리다 아내와 장모의 설전이 조금 있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이 구절의 말씀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것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는 말씀을 설명하며 이를 우리 생활에 적용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신이 한다고 한 것을 두고 서운해 하였고, 아내는 그러는 친정엄마의 집요함에 발끈한 것이다.
늘 그렇듯 사랑의 상실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왜곡된 사랑으로 서로를 억압한다. 분명히 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하는 것인데 받는 저로서는 간섭과 참견으로 싫다. 사랑은 좋은 게 아니라 싫은 게 되었다. 오죽하니 ‘가족이라 어려워!’ 하고 부모를 모시는 일에 ‘남이면 할 수 있다!’는 식의 인식이 팽배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랑의 반대급부가 시기와 질투로 살인까지도 불사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6).”
말씀이 우리 삶을 건드리지 못하고 우리가 그 말씀과 상관없을 때 이는 그저 글자일 뿐이고, 성경은 그저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일 뿐이다. 나는 말씀을 전하며 이를 우리 생활에 끌어와 씹고, 삼켜, 소화시켜서 나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성경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이를 접목시킬 때 어제와 같은 논쟁으로 어떤 감정이 개입되고 부딪치면서 서로 다투게 된다. 한동안 저 둘은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뜻을 항변하였다. 급기야 언성이 높아지면서 나는 저들을 진정시켰다. 아내도 안다. 장모도 안다. 서로는 서로에게 잘하고 싶은 것이다. 둘도 없는 모녀사이다. 나는 자주 아내에게 ‘한 영혼으로 사랑하기’를 강조하며 거리두기를 부탁한다. 그게 어려운 까닭은 결국 사랑 때문이다.
급기야 죽기 전에 정 떼려 그런다는 말까지 나오고, 나는 그와 같이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우리 사랑의 한계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결론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모든 사랑의 감정은 봉쇄되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결국 우리가 그 사랑의 감정을 회복하려면 ‘여자의 후손’ 곧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위할 수밖에 없다. 자식을 대하는 일도, 심지어 아내를 대하는 일도 ‘한 영혼을 위하듯’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허사다. 결국은 다툼이 된다. 시기와 질투, 모욕감과 수치는 안으로 더 깊숙이 안으로 눌러가면서 결국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게 된다.
오늘 이스마엘의 행적이 그 내면에서는 그러했던 게 아닐까? 왕족으로서 소외된 자신의 위신도 있고, 민족이 와해된 마당에 그게 다 그다랴 때문이라는 원망으로 나타나면서… “그가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4).” 하나님과의 사랑의 단절은 본의 아니게 서로를 왜곡한다. 이해는 오해가 되고, 배려는 배척이 되면서 상대에게 본심을 알릴 길이 막혀버렸다. 이에 따른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은연중에 우리는 어떤 게 진짜 자기 자신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0-11).”
마음이 어려워서였을까? 장모는 울기 직전까지 서운함을 말하였고, 아내 역시 울기 직전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다 끝난 예배로 불편했던 모양이다. 아홉 시가 돼서 잠에 들었는데 서너 시간 뒤 잠이 깨서 교회로 나왔다. 그런 뒤 말씀을 열었는데 이스마엘의 이 끔찍한 현장 한복판에 세워졌다. 점점 더 골이 깊어지느니 요양원으로 모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고…. 우리 안의 죄란 그게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턱을 괴고 잠시 이 말씀을 입에 머금는다. 아무도 모르는 줄 알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작 자신만 모를 뿐이다. 죄를 숨기고 산다는 일은 그러하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모두는 알고 있다. 그 실체가 어떠하든지, 오늘 본문 5절, “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물론 저들은 멸망한 유다를 애곡하려 순례자들로 온 것이지만… 스스로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성전으로 향해 가는 행위는 극한 슬픔과 애도의 한 표현이다. 또는 회개의 한 단면이다.
실제 이러한 행위는 이교도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수염 끝을 상하게 하지 말고,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을 금하셨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 곧 이는 우상을 섬기는 행위로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왕상 18:28).” 곧 이와 같은 종교행위를 하나님께 향한 인간의 애통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바른 지식과 올바른 행함으로가 아니면 부풀려진 감정이 더해지기 마련이다. 우리 스스로 홀가분하자고 카타르시스에 젖기 위해 죄를 고하며 눈물로 호소하는 게 아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좋게 좋게 그저 좋은 뜻으로 봐주는 데서 왜곡은 고착되어 교회 문화가 된다. 우리의 종교심이 종교행위로 부풀려져 이교도적인 것으로 혼용되게 해서는 안 된다. 종종 드는 생각이지만 가족이라서 더욱 남을 대하듯 하는 감정분리 단계가 필요하다. 과몰입되는 감정은 사랑이었다 해도 자해 같다. 결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당연히 마음은 앞서지만 이를 멈추고 주의 사랑으로,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우린 내 자식이나 부모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남만 못한 관계가 그래서이다.
그 와중에 생명을 부지하여 “그 중의 열 사람은 이스마엘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 하니 그가 그치고 그들을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죽이지 아니하였더라(8).” 오늘 말씀은 한 구절과 한 구절 사이에 그 여백이 많다. 자주 멈추고 나의 이야기로 다시 읽게 한다. 잠시 괜찮은 것 같을 때가 문제다. “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 곧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을 이스마엘이 사로잡되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사로잡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떠나니라(10).” 그다랴를 죽이고 이스마엘이 승리한 것 같았고, 뜻하지 않은 순례자들의 곡식까지 부수입으로 얻은 줄 알았으나… 결국 저는 고립되어 암몬으로 갔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 14:22-23).”
말씀 앞에 앉아 그 내용을 살피고, 그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일련의 상황을 두고 기도하게 된다. 어쩌면 내 안에 있는 ‘이스마엘’의 시기와 질투가 나를 주도하려 들지는 않는지… 그러하였던 때를 더듬으며 오늘 저를 경계하는 까닭은 어찌하든지 우린 우리 스스로 사랑을 할 수 없다! 하면,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하시는 이 말씀으로 은혜와 구원, 이 놀라우신 사랑의 결과로 살아야 한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41:4).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기도이었고 그 기도는 솔직하고 진솔해야 한다. 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곧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5).
아뢰고 인정할 때 의연해진다. 사람 관계, 그것이 설령 가족이라 해도 한정적이다.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도 수두룩하다. 사랑해서 더 힘든 사람도 허다하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9).
그렇게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가까운 이로 더욱 그러하다 해도,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0-11).
내가 주로 기쁨이 되는 길은 주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9).” 그러므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슬픈 일이나 또한 이로써 주를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서로 정말 죽기 전에 정을 떼려는 것인지…, 나는 요즘 자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할 말을 잃는다. 그러니 누구에게 연락하던 일도, 저의 이런저런 일에 사랑을 갖는 일에서도, 한참씩 머뭇거리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데….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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