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예레미야애가 4:17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시편 56:10
예루살렘의 참상이 묘사되고, 그것이 죄에 따른 것임을 나타내고, 그러는 중에도 이방 신과 사람을 더 의지하는 모습을 띈다.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하는 탄식이 순수하였던 신앙은 간 데 없고 변질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1-10). 이는 지도자들이 부패하여 더욱 그 책임과 의무가 상실되었다(11-16). 그러므로 백성들은 더욱 이방을 의지한다(17-20).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징계는 종료될 것이고,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21).” 이내 이방민족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22).”
우리의 한탄과 비애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후회는 회개로 이어지고 회개는 찬송이 되어 올려지는 것이다. 시편 137편을 설교원고로 작성하면서 나는 절망 가운데 소망이 있음을 알았다. 죄는 우리의 존귀함을 앗아가나 징계로 이를 다시 되찾게 될 것이다. 우린 엄연히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의 보석’ 같은 존재이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사 62:3, 슥 9:16).”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으로 더는 희망이 없을 것 같을 때도 우린 주께 아뢴다. 절망의 탄식인 줄 알았으나 소망을 찬양하고 있었다. 죄로 인하여 우리의 존귀는 언제든지 깨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모든 능력이 주께 있음을. 나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알도록 이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러한 말씀 앞에 승복한다.
죄는 질그릇이 깨지듯 죽을 수밖에 없게 하나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그런 가운데 우린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면 나는 지금 어떠하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를 스스로 시험하여 보라고 하는 바울의 심정을 알겠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13:5).”
자칫 우리의 가장 큰 난제는 스스로 옳다 여기는 것이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스스로 허용하는 죄의 범주다. 다 그렇지 뭐, 하고 자신의 죄에 개의치 않으려 하면서 그 영혼은 자정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지난 날 나의 그러하였던 때를 기억하며 탄식한다. 나의 후회와 부끄러움은 주께 고함으로 더는 내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닌 게 되어,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1, 22).”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여전한 나를 탄식하며 통회하는 일이다. 하나님으로만 모든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애 4:5).” 이 비참한 참상이 그것으로 끝이 난다는 그야말로 비극적이다. 둘째 아들 탕자가 결국 돼지우리에서 비애에 젖어 생을 마감하였다면 더는 다룰 이야기가 없는 것과 같다. 이에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10).” 이 상상도 못할 현실 앞에서 우린 좀 나은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시 27:10-11).
그리하여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우린 소망한다. 비록 주의 이름을 부르기에도 자격이 없지만 돌이켜 주를 바랄 때 주는 영접하신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하여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40).”
오늘 우리가 어쩌다 교만하고 안이하게 되었는지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우리가 만족함으로 죄를 죄로 여기기 싫어하면서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오늘의 우리 모두는 어떠한가? 이 세상에는 만족함이 없어서 더, 더,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그뿐인가?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의외로 많은 성도들까지 이에 무뎌진다. 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11).” 독주라 하면 우리의 신경을 혼미하게 하여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는 일인데 ‘술이 깰까봐 술을 마신다’는 <어린왕자>의 어느 혹성에서 만난 술주정뱅이의 말이 일상에 파다하다. 그래서도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단지 어쩌다 한 거짓이 아니다. 거짓에 거짓을 더해 단단한 수레 줄로 삼아 산다. 실상은 어느 게 자신인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우린 진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선과 악을 뒤집어버리고,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스스로의 판단으로 ‘자기 인생’이라 주장하며,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알아 생수의 우물을 곁에 두고 삽질하며 땅을 파는 형국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오늘 본문의 결과는 그러하여서이다. 이에 성경은 끊임없이 촉구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2-5).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33:16).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37:39-4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68:20-21).
때론 이를 깨달아 알 때가 ‘물고기 뱃속’에서였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9).” 어쩜 우린 오늘 본문과 같이 고난의 때가 아니면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는 능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여 별 수 없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하나님은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 받는 것을 그대로 두실 수 없다.
하여,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1:8, 11).” 이를 증거하듯 오늘의 이 참혹과 참상을 묘사한 후 결론으로 말한다.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애 4:22).” 주는 결코 아주 버려두지 않으신다. 이를 믿음으로 호소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56:1).
우린 이제 고난을 인간적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의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고, 고난은 나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그러므로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 31:1, 6).” 하면서 말씀은 오늘도 촉구하고 외쳐 다급하시다.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5).”
이와 같이 말씀에서 말씀으로 이어져 나로 주를 찾게 하시는 이 시간이 나는 귀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 퍼뜩 이른 새벽에 서둘러 주 앞으로 오는 것은, 말씀으로 시작하고 말씀에서 살 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놓고는 번번이 또 금세 우울과 걱정과 염려가 엄습하여 나를 짓누르기 일쑤이나 이젠 그것으로 오히려 절실하여서 나의 감사는 간절하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그리하여 감사가 간절하다는 것은 감사를 잃을 때 나는 속수 무책으로 무너질. 깨어질 질그릇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팔이 힘이 없으면 남은 팔로, 한쪽 다리가 힘을 잃어가면 남은 다리로, 오늘은 소염진톻제만으로, 오늘은 파스로 대신할 수 있어, 감사는 감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면서 무너지지 않게 한다. 하여 나의 감사가 필사적일 수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3-4).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아멘.
가만히 말씀 앞에 멈추어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눈을 감으면 감사할 게 많아 눈물이 흐른다. 일찍이 죽어도 마땅하였을 나의 영혼을, 일상에서 여러 우여곡절이 이를 알게 하심이 또한 감사하여서. 오늘도 내 힘으로 걸을 수 있고, 내 곁에 사랑하는 이들을 허락하심이 감지덕지하여서. 때론 육신이 고달파 짜증스럽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한다. 하는 일도 없이 주의 종이라 여기심을 받는 데 있어, 귀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심이 고마워서. 말씀으로밖에는, 말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시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은, 나의 고질적인 아집과 아둔함을 알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나는 필사적으로 감사를 잃지 않고 싶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0).
말씀으로만 말씀에서만 만족함을 얻기를. 그러므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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