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전봉석 2023. 7. 1. 04:13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에스겔 1:28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편 58:11

 

 

 

여호와의 영광이 이상 중에 에스겔에게 나타나신다. 에스겔은 B. C. 593-571년까지 22년간 활동하였다. 저는 바벨론에서 하나님께로 받은 계시를 기록하였다. 여느 예언서보다 그 시기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는 그발 강가에서 사로잡힌 자들 중에 있었다. 당시는 605년과 597년 두 차례의 바벨론 유다 침공 때 사로잡혀간 사람들이다. 2차 때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그발 강가 델아빕에 거주하였다.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겔 3:15).”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1:2).” 곧 여호야긴은 19대 왕으로 597년에 즉위하였는데 3개월 만에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폐위되고 포로로 잡혀갔다. 그때가 593년으로 그때 에스겔은 서른 살로 30세에 소명을 받고 52세까지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3).”

 

이를 보면 하나님은 포로 중에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셨다. 이를 신약으로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곧 우린 절망 가운데서도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본다. 오늘 1절,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곧 하나님은 저들이 애굽에 있을 때도 바벨론에 있을 때도 거기에 함께 계셨다. 거기서 하나님은 사명자를 세우시고 저에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 3:8).”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감당할 수 있다. 누가 처한 상황에서 저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지기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도 그것이다. 반드시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에 어떤 사연을 듣고 마음에 남아 우리가 주께 기도하는 것은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2).” 우리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지혜도 마음도 허락하심을 안다. 하여 바울은 단언하길,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이어서 에스겔이 보는 네 생물의 환상을 언급한다. 저는 여호와를 수종드는 것으로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4-5).” 그리고 각각의 얼굴과 날개, 이들이 돌이키지 않고 곧게 행하였다(7-9). 네 개의 얼굴은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10). 사람의 얼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는 고귀한 지혜를, 독수리의 얼굴은 날쌔고 높음을 상징하며, 소의 얼굴은 우직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봉사와 충성을, 사자의 얼굴은 권세와 힘을 일깨운다. 이것이 네 바퀴로 일치하게 하나님의 감찰과 섭리가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을 상징한다.

 

세상 어느 곳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에서 벗어난 게 없음을 인정하게 한다. 할 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수긍하려하기보다 순종함으로 범사에 주를 인정할 수 있다. ‘네 생물’에 대한 이상은 10장에서 ‘그룹’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겔 10:15).” 그룹은 성전 지성소의 언약궤 위에 날개를 펴고 있는 천사의 형상으로 오늘의 네 얼굴은 각각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운다. 여러 해석이 분분하겠으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범주가 하나님의 섭리다.

 

전에 친구는 성경을 읽다 어느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 하였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겪은 어떤 어려움에 대하여도 ‘이해할 수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같은 생각인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 영역이 믿음의 영역이다. 이해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중에도 주를 신뢰하는 것,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6-27).” 우린 우리 자신도 다 알지 못한다. 하물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결코 사소한 일에도 하나님의 주권은 발휘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오늘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일, 참으로 곤란하고 난처하여 그 속에 하나님께 대한 반감이 들 정도에서도,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시 145:15-1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8:6, 9).

 

우리 안의 이와 같은 영광과 찬송이 울려퍼지게 하시려고,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고로 오늘 이 네 생물의 형상은 성도의 본분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지혜와 용기와 충성과 앙모함으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5-46).” 곧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기이한 상상으로 형상화하여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표현은 어리석다. 모든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것으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러할 때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이를 음험하게 묘사하여 자극적인 표현으로 엉뚱한 상상을 더하는 일은 불순하다. 이에 예수께서도 사람이 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말씀 앞에서 가만히 묵상하는 일,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우린 다만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을 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그리하여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우린 그에 따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무던하게, 묵묵하게 주의 말씀을 주의 하는 것. 그럴 때 우리 안에 생겨나는 어떤 담대함, 도무지 나는 감당할 수 없으나 할 수 있다 하시는 이가 하게 하심을 믿고 따름으로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주께 꼼짝 마라! 하고 붙들리고 난 뒤에 오히려 자유함을 느낀다. 돈이 없는데 돈으로 끌려다니지 않고, 몸이 안 좋은데 몸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는다. 물론 고통을 느끼는 일과 그에 따른 실의나 낙심은 여전하다. 돈이 없어서 전에 보다 자유롭게 나다니지 못하고 쓰지 못해 답답하다. 당연히 답답함이니 고통을 느끼지만 그것을 위해 기를 쓰고 다른 무엇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답답하지 않아? 하고 누가 하루 종일 거의 교회에 있는 나를 안타까워할 때 답답하여 어디로든지 훌훌 날아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는 것, 나로 주가 아니면 살 수가 없게 하신 데 따른 감사와 평안이 더 크다. 하여 더는 건강 문제로, 앞날의 이런저런 우려나 염려로 마음 졸이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의 우직함과 독수리의 자유로움과 사자의 용감함이 나의 하루를 붙든다. 누구의 어떤 일에 대하여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하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나의 하루하루가 드려지는 향기나는 주의 제단이기를.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58:11).

 

하는 오늘 시편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할 때,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나는 이처럼 말씀을 찾아보고 따라가며 가만히 입에 머금고 있을 때에 알겠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내 마음을 지킨다는 것, 이에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말씀 앞에 우뚝 서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누굴 생각한다. 나의 어떤 일로 마음을 어려워한다. 그러나 전에처럼 내가 어찌 해보려 안달하지 않는다. 안달 나는 마음을 말씀으로 붙든다. 그리고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럴 때에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2).

 

그러므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3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