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전봉석 2023. 6. 28. 04:57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예레미야애가 3:33, 57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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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으로 야기된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예레미야는 아뢰고 구하고 전한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징벌을 당하며 절규하고(1-18), 그런 가운데서도 선민을 진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19-23). 예레미야는 그런 가운데 중보자 입장으로 선민에게 권고하고 하나님께 호소한다(24-46). 유다가 겪는 참단한 현실을 토로하기도 하고(47-54), 여호와의 기도 응답을 촉구하며 원수에 대한 심판을 호소한다(55-66).

 

여기서 예레미야의 중보가 우리의 역할과 사명인 것을 확신하게 된다. 누구의 사정이나 상황을 흘겨 듣기보다 마음에 담고 이를 주께 고하고 또한 주의 뜻을 저에게 드러내어 그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하는… 그러기에 우린 고통에 예민하고 그 의미를 되새긴다. 오늘 1절,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당한 자는 나로다.” 곧 우리는 오늘의 어떤 사소한 일에서도 주의 뜻을 찾는다. 곧 오늘 당하는 이 일이 주의 분노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렇듯 이사야도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하며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고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3).” 처한 상황에 다들 둔감할 때,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4).” 그 실상이 어떠한가를 알고, 알리려고 하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5-6).”

 

우린 우리 자신은 물론 남을 위해서도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호소하는 자들이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렘 8:21).” 하고 당황하며 울고 중보할 때,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11:14).”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진심이 아니시다. 오늘 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이를 알기에 우린 주 앞에서 아뢰고 우리에게 격려하고 위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모세 역시 중간에서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자신을 버리신다 해도 주의 백성들을 용서하시기를 구하였다. 바울도 이에 크게 근심하고 그 마음의 고통이 있었으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늙으신 장모에게 그 남은 생을 안 믿는 두 손자와 며느리, 친자매들과 일가친척을 위해 생각나는 대로 기도하시기를 강조한다. 곧 우리의 중보기도는 우리 자신에게는 갈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나침반과 같다. 오늘 2절을 보면,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이를 위해 하나님은 어찌 하시는지를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3).” 곧 우리의 고통의 참뜻은 길라잡이와 같다. 어려움이 주를 바라게 한다. ‘어떤 일’을 두고 내내 생각이 많다. 생각하기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여 ‘어떻게 할까요?’ 하고 되묻게 한다.

 

고난의 역설을 주께 아뢴다는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희망이 없음으로 우린 좌절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주께 묻고 또 구한다. 이로써 우린 안 믿는 자들처럼 그 마음에 허망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가령 누가 어떤 일로 잘 되었다. 나는 저의 잘됨이 저로 주를 멀리할까 하여 마음을 졸인다. 또는 누구 일로 저의 어려운 처지가 안타까워 주께 구한다. 어쩌면 우리 믿는 자는 성령으로가 아니면 신경쇠약에 걸리기 십상이다. 위장장애를 달고 산다. 위경련이 오기도 한다. 누가 알겠나만 저로 인하여 속 끓이는 심정은 스스로에게도 설명이 안 될 때가 더러 있다. ‘내 일도 아닌데…’ 싶은. 그러면서도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게 낫지…’ 하는 마음도 들면서. 애면글면 구는 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주께 아뢰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에게 말한들 이해나 할까? 돌아오는 말은 뻔하다. ‘너나 잘해’ 한다거나, ‘할 만큼 했어’ 하는 따위의 것인데 이도 이미 내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니 오늘 시인의 심정으로,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 55:6-8).

 

가끔 누가 개척교회 사모로 살면서 성도들 때문에 울고 웃는 일은 당연하였다. 가령 청년 때부터 끼니마다 먹인 두 내외가 있는데 그 세월이 10년이었다. 받는 자는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안다고, 코로나 이후 이를 그만두자 볼멘소리로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어서. 사람 속이야, 끝 간 데 없는 게 사람 마음이라 하여,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을까. 주가 아니시면, 백 날 해 먹이고 희생해도 돌아오는 것은 마땅한 줄 아는 뻔뻔함뿐이다. 우리가 서운해 하면 더는 중보가 어렵다.

 

처음 글방에서 예배를 시작할 때, 그땐 늘 아이들 예닐곱 명이 그 좁은 처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학생들 헌금이란 게 얼마나 되겠나? 그러니 점심 한 끼를 위해 아내는 전날부터 분주하였다. 비빔밥을 하나 해도 그릇에 찬거리에 밥까지… 우린 마트 바구니 큰 거 두 개를 주일 아침이면 싣고서 인천에서 군포로 갔다. 특히 한 녀석은 사모님이 해주는 닭 칼국수가 가장 맛있다며 그 타령이라, 이게 간단한 것 같으나 엄청 손이 많이 간다. 그때는 그게 됐다. 그땐 또 아이들도 제법 예배에 나왔다. 첫 세례자가 일곱 명이었으니까! 오다말다 하는 아이까지 더하면 나름은 가장 부흥의 순간(?)이었다. 물론 가장 공교로운 날은 기껏 바리바리 싸들고 갔는데 한두 명도 안 왔을 때, 우린 그 주간 내내 카레를 먹던가, 비빔밥을 먹으며 찬밥을 해결하기도 해야 했다.

 

중보란 막연하게 편히 눈을 감고 저를 생각하며 유유자적 기도하는 전부가 아니다. 애끓는 심정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같이 엎드려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누군 저들 부부싸움에 여집사가 잘못한 것을 두고 이혼까지 말이 오가는 사이에게 결국 사모는 저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대신 용서를 구하며 중재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들 관계가 교회서 만나 서로 결혼한 것으로 같이 청년 시절을 돌아보며 끼니마다 먹인 사이라… 그래서도 누구 일에 사모가 먼저 속병이 나는 것이 나름 안 먹고 좋은 건 먼저 주며 보살핀 것인데 후에 엉뚱한 이유로 고소까지 하고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지어낸 것이니… 왜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 하는지, 어쩌다 그런 속설이 정설이 됐는지 알 것도 같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예레미야의 중보자적인 마음과 그 자세를 눈여겨보게 되면서 실제 이는 우리 성도의 사명인 것을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억울하게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14-16).” 어느 누구 여태 함께 하였던 예레미야를 위하는 이가 없다. 주의 사명자는 그리하여 외로운 길이다. 하여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1-22).”

 

우리의 실망과 좌절이 도리어 주의 긍휼을 발견하게 한다. 하여 바울은 고백하길,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또한 베드로 사도도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 이는 모두 우리 주님 예수의 앞서 가신 길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당장 본인이 십자가 달려 죽으실 것을 알면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또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3-24).”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일, 단지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로써 우린 주를 닮고 주의 길을 따르는데 그 길이 중보자의 길이었다. ‘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다. 떠나 주와 함께 있고 싶으나 남아서 우리의 곁의 한 영혼을 돌보아야 하는 일.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어서 나 혼자 주와 함께 살면 그만인 게 아닌 것이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0-22).”

 

전엔 누구 일에 끼어드는 것도 그 일로 마음 섞는 것이 싫어서 ‘친절한 타인’을 자처하고 살았다면 이젠 그럴 수 없어서 자꾸 밟힌다. 마음에 걸린다. 신경이 쓰여 가슴을 졸인다. 하여 이 정신과적인 문제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 주의 이름을 더욱 부르는 수밖에. 안정제를 몇 차례고 먹어가면서도 저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 ‘친밀한 사이’로 더불어 마음을 졸이며 가는 길. 중보란 저를 문안하고 싫은데도 위하여 기도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어쩌지 못하는 것. 오죽하니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렘 20:14-15).” 하면서도 주 앞에 엎드리는 일이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하여 우린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애 3:55-56).”

 

이에 맞춰 오늘 시편에서도,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55:1-3).

 

주가 아니면 우린 누구에게 호소할까? 실제 나로 낙심하고 어렵게 하는 이는 원수들이 아니다. 저들은 바로,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3-14).

 

하여 그 기억이 더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16, 22).

 

하여,

 

하나님이여

…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