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23. 6. 30. 04:10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예레미야 5:2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다섯 편의 애가 마지막 편이다. 첫 편은 공히 패망과 고통에 따른 여호와의 관심을 호소하였다. 둘째 편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중보자적 권고를 다루느라 모두 22절로 이루어지는 애가 중에 66절로 세 배의 말(言)들이 필요했다. 셋째 편에서는 징벌에 따른 고통과 절규 속에서 소망과 회복을 고백하고 있다. 넷째 편에서는 하나님의 징계의 원인을 인정하고 선민으로 곧 징계의 종료가 다가오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편에서는 회복과 간구의 내용으로 정리한다.

 

덧붙여 오늘 이어지는 다윗의 시편은 사울을 피해 굴에서 지은 시이다. 모두가 사는 일이 다르지 않아서 대문만 열면 슬픔이 새어난다. 고통 없는 생은 없고 저마다의 고통 가운데 우리 성도들의 특징은 고통 중에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함으로 주를 찬송하게 되는 일이다. 먼저 다윗의 시를 음미하며 시작하면 고통을 호소하다 이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7-8).

 

그리하여 안 믿는 가족들 사이에서 홀로 그 믿음을 지키며 기도로 이겨낸다. 그 속이 말이 아니라, 주께 아뢰지 않으면 고할 대상이 없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119:169-170).

 

예레미야의 다섯 편의 애가, 슬픈 노래는 찬송이 된다. 오늘 애가는 슬픔 시이나 찬송 시로 이 모든 상황이 죄로 인한 것임을 고백한다(1-18). 이때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회복시킬 것을 믿는 일이다(19-21). 이와 같은 심판의 고통에서 우린 호소한다(22). 살면서 우리가 겪는 수치는 우리 스스로 셀 수도 없이 많다. 누구의 모욕적인 말이나 시선에서 또는 원치 않는 상황에서 어쩌지 못하고 쭈뼛대고 있을 때도, 우리는 이내 기도의 끈을 붙든다. 오늘 1절,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어쩌면 우리의 가장 강력한 공격이고 방어이다. 우린 실패 가운데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고통 중에 응답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다다음 주일 설교본문을 살피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138:3, 6).

 

살면서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그럴 수 없는 가운데 마땅히 그럴 수 있는 자로 주 앞에 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나 같은 게’ 하는 마음이 짓누르듯 나를 억압하는데도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우린 그럴 수 있다. 그래도 되는 자이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어떤 기준이나 자격도 필요치 않다.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심은 우리가 주의 선민으로,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사 찬송을 받고자 하심이었다. 하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내가 시작한 게 아니다. 그럼 주가 알아서 감당하게도 하실 것이다.

 

가령 다 늦게 포도원에 들어와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은 자와 같다. 그때 아침 일찍 와서 나름 더 일하고 수고한 자가 억울해하자 주인은 말씀하신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마 20:13).” 사실 이 말씀을 물질의 개념으로 놓고 받아야 할 하루 일당으로 치면 불합리하긴 하다. 한데 여기서의 ‘한 데나리온’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그것이 모태신앙으로였든지 온갖 게으름과 허물과 실수로 다 늦은 때였다 해도, 주인 되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한 데나리온은 ‘주의 이름’이었다면… 모두가 공평하고 공평하여야 마땅할 감사와 애통함과 온유함으로 부를 수 있는 그 이름 예수.

 

저는 말씀이시고 말씀으로 오셨으며,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결국 우리의 순종은 이내 말씀대로 행할 때이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하나는 가겠다 하고 아니 갔고, 하나는 싫소이다 했다가 이내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어찌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다 늦어서 포도원으로 나와 한 시간 남짓 일했을 뿐인데 하루 종일 일한 자와 다를 바 없이 한 데리온을 주시니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라!

 

감사는 모든 고통의 뿌리다. 꽃은 떨어지고 가지는 시드는데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으로 사는 일,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이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18:2-3).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 우린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기꺼이 나는 안정제를 먹으면서도 이 길을 간다. 정신과 의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 치료제를 시도할 때마다 불안 때문인지, 실제로 약한 위장 때문인지, 결국 또 지난번에 받아간 한 달 치 치료약을 그대로 두었다. 어지럽고 울렁거려 두 번 시도하다 그만둔 것이다. 저는 그럼 또 어떤 약을 써봐야 하나, 하며 혼자 궁리를 하느라 더는 권할 게 없어 난처해했다. 나는 지금으로 괜찮다며 기존의 안정제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치과에서도 잇몸이 너무 약하다는 둥, 어쩌니 하고 설명할 때 나는 이만하면 됐고 그때 가서 틀니를 하든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든지 하자고 되레 저의 궁리를 사양하였다. 내과, 외과, 심지어는 한방에서까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는 것으로 머리가 빠지고 하얗게 샜든지 하는 일은 지극히 사사로운 일이라고 여긴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산다. 어제 받은 은혜는 어제로 족하였다. 내일 것은 알 수 없다. 주어진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어서 마치 오늘만 살다 죽을 사람처럼, 그래도 될 것처럼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17-18).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하루씩 한 걸음씩 그 은혜로도 족하여서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5-6).” 겸손은 어떠하든지 감사하는 것이겠다. 하여 나는 나의 고질적인 불안과 우울을 사랑한다. 내가 가진 육신의 약함으로 주의 긍휼하심을 바란다. 다윗에 굴에서 사울에게 쫓기는 중에도 그 마음이 확정되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3-5).

 

우린 어떤 잘못도 허물도 없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고 주께 아뢰어 고백함으로, 여기가 천국이다. 그리하여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우리의 선행으로가 아니라 주의 긍휼하심으로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어라 하고 살고자 하느니 살고자 하여 날마다 죽는 게 지혜였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오늘은 나의 아집이 이만큼 죽고, 오늘은 나의 소망이 저만큼 이루어져서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애 5:19).” 여전한 가운데서도 우린 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57:1).

 

사는 게 지옥이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더는 어쩔 수 없는 것들로 괴로울 따름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나는 안도한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산다는 것만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4:11-12).

 

하여,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57:2).

 

더는 무서울 게 없는 이 확신,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57:7).

 

이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말씀으로만 새 힘을 얻으며, 주어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