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37편 / 회개와 찬송

전봉석 2023. 6. 29. 17:07

230702 주일

 

시편 137편

회개와 찬송

 

시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 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 137: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들어가는 말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바벨론이다. 곧 오늘 우리는 모든 게 무너진 것을 본다. 그런 곳에서 산다. 가정마다 가장의 권위는 무너졌다. 학교마다 선생의 존경은 무너졌다. 성적 윤리와 도덕도 무너졌다. 각종 귀신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 증거는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소설의 소재로 쓰인다. 사람들은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즐긴다. 여름이 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 각종 더러운 영들이 지배한다. 차별금지법을 내세우며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성정체성이 와해되고,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며 온갖 악한 영들이 득세한다.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살아남는다. 소위 ‘철새정치’가 먹힌다. 서로들 묵인하며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다. 가짜뉴스를 뚜렷하게 통제할 기능을 상실했다. 이러한 더러운 새들이 개인방송이니 뭐니 난리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저들이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는 그 신앙을 지키며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기가 어렵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벨론 갔다고 울기만 하고 모두 우울증에 걸려 시무룩하게 살아야 하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그뿐 아니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4-7).”

 

우린 다니엘과 같이 어엿하게 살아야 한다. 저도 바벨론에 끌려갔으나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고 찬송하며, 저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와 메대의 정국에서도 모두 총리로서 그 맡은 바 사명을 다했다. 어떻게 저와 그 친구들은 그럴 수 있었을까? 똑같은 상황에서도 우린 이곳에서 텃밭도 가꾸고, 가정도 꾸리고,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평안도 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만 이 끔찍한 바벨론에 보내신 게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5-7).”

 

오늘 우리가 ‘바벨론’에 살면서 저들을 위해 살지 않고, 저들처럼 살지 않고, 저들을 위해 ‘노래’ 부리지 않으면서도 평안히 살 수 있는 것은 천국이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으로만 부유한 자들이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우리에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곧 우리의 능력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저주 시다. 그러나 또한 찬송 시다. 후회와 탄식의 시이나 동시에 찬양과 경배의 시이다.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흥에 겨운 노래와 찬송은 다르다. 이를 시편은 명확히 한다. 시적 구성은 3연으로 나뉜다. 1연(1-4절)은 후회로, 하나님께 찬송해야 하는 것을 이 세상은 여흥거리로 전락시켜 그 비애를 밝힌다. 2연(5-6절)은 회개로, 포로로 잡혀 있으나 예루살렘을 잊지 않는다는 결단을 밝힌다. 3연(7-9절)은 찬송으로, 예루살렘이 유린당하고 원수들이 승리한 것 같으나 주가 회복하실 것을 찬송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린 후회와 회개가 다른 것과 회개는 후회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는 것을 살필 것이다. 인생을 살며 후회가 없는 삶이면 좋겠지만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인생도 없다는 사실을 우린 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면 후회 속에서도 찬송하는 길이 있음을, 후회를 회개로 바꾸어 하나님께 아뢸 때 우리의 노여움을 찬송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 후회

 

-찬송이 이방인들에게 여흥거리로 전락한 비애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37:1).”

 

바벨론에 있는 강은 유프라테스 강 하나뿐이다. 이를 끌어다 여러 수로(水路)를 연결하여 도시마다 공급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강변”이라 할 때, 이와 같은 일이 한 곳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바벨’은 ‘신(神)의 문’이란 뜻으로 ‘바빌리아’를 뜻한다. “거기 앉아서”는 ‘잠시 앉다’는 뜻보다 그곳에 ‘정착하다’, ‘거주하다’의 뜻에 가깝다.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애 2:10).” 하는 예레미야의 애가를 볼 때도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18).” 하는 진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저들은 그렇게 날마다 울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3:49).”

 

왜 그런가? 포로로 끌려온 것도 모자라 바벨론인들은 자신들의 여흥을 위해 ‘찬양’을 불러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 137:3).” 속된 말로 접대부로 끌어와 자신들의 기쁨을 채우려한다. 그래서 저들은 아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2).” 시적 의미로 ‘버드나무’는 슬픔을 암시한다. 버드나무는 버들 류(柳)로 가지가 연하고 잎이 풍성하여 바람이 불 때, ‘사시나무 떨듯 한다.’ 사시나무와 버드나무는 둘 다 활엽 교목이다.

 

우연히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 연주를 거부했다는 의미 이상이다. 4절에 보면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그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절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들의 노래는 ‘여호와의 노래’다. 이는 찬송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면서 감사이다. 이를 여흥거리로 사람의 기쁨을 위해 부를 수 없다. 저들은 비참하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암 7:17).”

 

이에 저들은 후회하고 통회하며 기도한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2. 회개

 

-포로로 잡혀 있으나 예루살렘을 잊지 않는다는 결단.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시 137:5).”

 

주권을 빼앗기고 포로 생활 중에 어찌 기쁘게 노래할 수 있을까?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하는 것은 암담한 상태에 처해 악기를 연주할 수 없음을, 이어서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6).” 후회만 하고 재주만 잊는다고 될 게 아니라, 내가 노래할 바에 차라리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하고 통회한다. 이는 앞서 들었던 경고였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겔 3:26).” 즉 고향을 기억하지 않고 혀를 놀리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 이를 쉬운 성경으로 다시 읽으면,

 

“오 예루살렘아, 만약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잃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어 버릴 것이다(우리말 성경).”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산다. 앞서도 밝힌 것처럼 이는 명령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4-7).”이는 우리의 증거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3. 찬송

 

-여호와여 기억하소서.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시 137:7).”

 

예루살렘이 공격당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음을. 이를 허용하신 것은 자신들을 징계하신 것임을.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애 4:21).” 바벨론 저들도 똑같이 멸망할 것임을. 그러나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22).” 하나님의 선민은 이 허물에서 놓여날 것임을. 하여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에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폐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겔 25:13).” 주가 갚으시고 회복하실 것을.

 

그러므로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시 137:8).” 여기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이를 행하실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찬송한다. 주께 복을 돌린다. 그러므로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9).” 이는 저들이 처참하게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편에서의 철저한 공의는 사랑이다. 누구도 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우린 여러 강변에 앉아 울지만 동시에 우리의 애통함으로 천상의 위로를 산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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