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34편 / 손을 들고 송축하라

전봉석 2023. 6. 2. 06:58

230604 주일

시편 134편

손을 들고 송축하라

 

시 134: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들어가는 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의지적으로 ‘여호와를 송축함’에 대하여 오늘 시편은 노래한다. 이를 위해 우린 ‘이것들’을 피해야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들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10, 8)” 하는 것을 앗아간다. 왜냐하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이는 이 땅에서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 곧 영원한 형벌로 이어진다. 고로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며 사는 꼴이다. 돈돈거리며 돈의 노예로 살 수밖에.

 

‘이것들을’ 피해야 비로소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다. 이는 다시 영생으로 이어져 “영생을 취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는 존재들로 살게 하려 하심이다(11-12).

 

오늘의 주제는 ‘송축’이다. 송축은 경사를 기리고 축하하는 일이다.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서의 일상이다. 지난주일 말씀에서도 우린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우린 영생을 누려야 할 자들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지음 바 되었다. 이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5-6).”

 

이에 오늘까지 열다섯 편의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노래>를 다루었다. 우리의 복이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동참함으로 얻는 행복감’이다. 시편 1편과 129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①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②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③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④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⑤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1-2).” 하는 증거와 함께 “여호와를 경외하며 ①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②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128:1-2).” 여기서 보면 따르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고, 말씀을 즐거워하는… 이 모든 게 의지적인 행동임을 안다.

 

즉 수동적으로 믿고 어쩌다 천국에 가는 존재가 아니다. 앞서 바울의 설교에서 ①피하고, 따르며,싸우라.취하라. 하는 행동강령을 볼 수 있었다(딤전 6:11-12).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곧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다시 말해 행동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나타내 것’은 우리의 실천에서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예수께서 이를 행하셨다. 다시 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릴 위해 허리를 굽히셨다! 오늘 우리의 송축은 행동하는 믿음의 절정이다.

 

가령 오늘 시편 2절,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134:2).” 여기서 ‘손을 들고’는 항복의 의미이면서 동시에 경배의 행동이다. 의지적인 행동으로 우린 천성을 향해 떠나면서 <회개>로 시작하였다. 시편 120편,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2).” 우린 자백하였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 사람들이다. 두 손 들었다. 시작이 ‘항복’이었다면 그 끝은 ‘송축’이다. 오늘 본문으로 바로 들어가겠다.

 

1. 첫 걸음은 회개이다.

 

회개는 회개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노아의 방주 문이 닫힌 후에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믿는 자의 ‘회개’는 믿는 자의 ‘송축’으로 완성된다. 이사야는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는 말씀을 전하였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는 순례의 길을 떠나는 계기가 된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 32:5).” 회개는 의지적인 행동에서 나온다. 누가 시켜서 죄인임을 인정한 게 아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하는 고백은 우리 성도들의 첫 걸음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두 손 들고 항복했던 회개가 두 손 들고 송축하는 자리로 들어간다는 것을….

 

2. ‘보라, 밤에’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밤과 낮은 연속된다. 반복적으로 밤이 찾아온다. 고난은 우리로 평소 잊고 있었던 간절함을 회복시킨다. 잃어버린 소망을 찾게 한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에 지혜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하고 반문한다. 그런 뒤 인생의 낮과 밤에 대하여 “형통한 날(낮)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밤)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왜 알지 못하게 하셨을까? 왜 말씀은 계시일까? 묵시일까?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그리하여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34:1).” 뒤집으면 밤에 볼 수 있는 것, 자신이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사실. 그 사실이 우리로 두 손을 들고 주를 송축하게 하는 것이다.

 

어느 심리학는 ‘생각하기’가 ‘행동하기’를 미룬다고 하였다. 실제 주춤거리고 망설일 때, 생각 좀 해본다고 할 때 행동하기는 미뤄진다. 성경의 위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노아는 언제까지인지도 모르면서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실 때 생각할 시간을 달라하지 않았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길을 떠났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창 22:2-3).” 주일에 교회로 오는 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몸을 여기에 두는 일, 이와 같은 행동하기가 우리로 잡생각을 따르지 않게 한다.

 

3. 고난은 순종을 배우게 한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120:1-2).” 순례의 길은 환난의 길이다. ‘회개’로 길을 나서면 각오해야 한다. 어느 사회학자는 말하길, 전문가란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그 일을 더 잘한다.’ 다른 말로 하면 ‘행동수정’이다. 행동이 따르면 마음도 온다. 백날 각오하고 마음먹은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오늘 시편 2절,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134:2).” 할 때 우선은 두 손을 드는 것에 대해 항복에서 순종으로, 곧 회개에서 송축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두 손 드는 곳은 성소를 향해서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가 아니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더 나은 안락한 삶을 위해 손을 드는 성도들도 허다하다. 저들은 성전에서 손을 내리고 세상에서는 손을 든다. 성도를 섬김에 있어서는 허리가 꼿꼿하고, 사회생활에서는 90도로 허리를 굽실거린다. 무엇을 위한 송축인지를 분명히 할 때이다. 행동은 모호하지 않고, 생각은 흔들리지 않으며, 시선은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송축이란 주만 바라는 경사다.

 

이때의 고난은 우리로 간절하게 한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이 하게 하신 근심으로 표현하여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9).” 하고 정의한 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 이에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곧 우리는 고난으로 근심하나 이는 징계로 인함인데 징계가 없으면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우리의 믿어서 듣는 게 아니라, 들음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곧 생각보다 행동으로, 순종이란 ‘예’ 할 때 가능하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 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 ‘생각만 한 개구리는 생각도 않은 개구리와 결과가 같다.’ 감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적그리스도와 다를 게 없다. 바울은 그래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굳은 결심이나 결단, 강인한 의지가 아니라 행동으로다.

 

4. 송축과 축복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 134:3).” 회개가 그리스도인으로의 전환이었다면 송축은 그리스도인으로의 영원한 삶이다. 몸을 쳐 복종케 하는 것은 순종에 따른 승복이다. 송축은 항복과 같이 두 손을 들게 한다. 그때에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이 복의 출처는 순응이고 순종으로 인함이다. 아브라함은 ‘잠깐만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하지 않았고, 대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출발했다. 성경에 보면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방해될 그 무엇도 접촉하지 않았다. 우리의 행동하기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앎으로 가능해진다.

 

욥은 알았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그러할 때,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시 134:3).” 이와 같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이는 두 손 들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송축은 자신한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1-2).” 이 떳떳한 신앙은 두 손 들고 항복한, 회개한 성도만이 가능하다. 그때,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133:3).” 지난주일의 결론이었다. 여호와의 명령으로 우린 복을 받고 누린다. 그 결정적인 순간은 영생이다.

 

그러므로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34:1).” 오늘 시편은 권고가 아니다. 명령이고 결국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그러므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19:9, 18).” 우린 듣고 행동한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13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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