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40편 /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전봉석 2023. 7. 28. 12:47

230730 주일

 

시편 140편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시 140:6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시 140:7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시 140: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 140:13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들어가는 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9-13).”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다. ‘원수’의 박해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문이다. 또한 원수들에 대한 저주 시이다. 악은 우리를 괴롭힌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하셨다. ‘광명의 천사’로 악은 선을 구사한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심지어 예수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하셨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악’, ‘원수’라는 개념이 단순하게 어떤 행위, 악행을 의미하는 게 아닌 것이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곧 사랑이 제일인데,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여기서 사랑도 어떤 행위로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곧 이것이 사랑이고 선이고 의이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3-5).” 하심으로 빛과 어둠, 낮과 밤을 나누어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우리가 생각하는 악과 선,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 낮과 밤의 개념을 수정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시적정황으로는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 왕을 지칭하거나 아들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동료와 선지자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악에 속한 형질을 가지고 산다는 것, 그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면서 당면하는 현실에서 바울은 절규하였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곧 우린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는 바울의 절규가 저만의 일일까?

 

아담의 죄로 우린 누구나 ‘생명나무’로 갈 수 있는 길이 막혔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그랬던 차단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8).” 곧 그 길이 열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를 위해서도 우린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날마다 필요하다.

 

본문이해

 

다윗은 ‘악인들의 행위’로 놓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실 것을 기도한다. 시적배경으로 악인들을 저주하는 ‘저주 시’이면서 동시에 내적의미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 시’이다. 시적구성은 2연이다. 1연은 1-5절, 8-11절로 ‘악인의 횡포에 대한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신뢰’가 담겨있다. 2연은 6-7절, 12-13절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는 선하심을 찬송한다.’

 

① 악인들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호소(1-5)

② 악인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호소(8-11)

③ 믿음의 고백(6-7)

④ 우리를 변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의(12-13)

 

두 연을 각각 묶어, 첫째, 악에 대한 호소. 둘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다.

 

1. 악에 대한 호소(1-5, 8-11).

 

① 고통에 따른 호소(1-5).

악은 고통스럽다. 일순간 좋은 순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잠시뿐이다. 우선 다윗은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1).” 하고 기도할 때, ‘나를 건지시며, 나를 보전하소서’ 한다. 단지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2)” 하는데, 악은 어쩌다 한 번 우발적이지 않다. ‘매일 모이듯’ 지속적이다. 또한 악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그들이,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여 작당을 한다.

 

그렇게 모여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3).” 즉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아는 악의 형태가 아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 이를 위해 악에게 틈을 주면 안 된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이에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4).” 우리는 저들을 상대할 수 없다. 이 싸움은 혈과 육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즉 악은 우릴 노린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셀라)(5).”

 

② 악인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호소(8-11)

다윗은 가차 없이 주께 고한다.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시며 그의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스스로 높일까 하나이다 (셀라)(8).” 오늘 날 우리 사회 구조는 악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번다. 돈 없고 빽 없으면 멀쩔하게 당한다. 저들의 성공은 기정사실이다. 구조적 환경도 그렇고 문화 자체가 저들에게 유리하다. 사회란 문화로 이루어져 있거, 문화를 형성하는 주체가 ‘돈’이며, 돈은 일만 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건한 자로 살기 위해서는 ‘자발적 외톨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접대문화를 어쩔 것인가?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은 또 어쩔 것인가? 그러므로 “나를 에워싸는 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들 때에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9).” 우린 우리 의지로 저들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여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10).” 하나님이 저들을 좌절시켜 주셔야 한다. 우리에게 강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11).” 오직 주만이 하실 수 있다.

 

2. 하나님의 도우심과 정의(6-7, 12-13).

 

③ 신앙 고백(6-7).

우린 모두 각자의 신앙고백을 가져야 한다. 고백할 게 없는 성도는 그 심령이 황량하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6).” 자주 언급하듯 ‘나의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성도는 다들 감격할 때 멀뚱하니 어색하다. 우린 우리만의 뜨거운 회개가 있어야 하고, 그럴 때 뜨거운 감사도 있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7).” 이와 같은 체험적인 고백 ‘내 구원의 하나님’으로 1인칭화 할 수 있는 ‘나만의 구원, 나만의 주 여호와’를 소유해야 한다. 그의 사랑 안에 뜨겁게 거하는 성도라면 누구라도 ‘주의 보호와 변호’를 요청할 수 있다.

 

사도요한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곧 나의 대언자, 나를 변호하실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심판대 앞에서 증언하실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심판장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 예수의 대언을 거부하실 수 없다.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우린 무장해야 한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그리고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당당히 모든 부조리한 문화와 맞서 상대해야 한다.

 

④ 하나님의 정의(12-13)

그럴 때 확신이 믿음의 실체는,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12).” 결코 우릴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스스로 부인하고 거절할 때도 하나님은 놓아두심으로 하나님 없이 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게 하신다. 다만 그 시간은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러므로 누구도 속단할 수 없다.

 

이에 우린 날마다 결단한다. 결단으로 해결되지 않지만 결단이라도 해야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 정직한 영혼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서이다. 그렇게 주 앞에 숨기지 않을 때,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우린 비로소 주의 얼굴을 대면하고 산다. 곧 자신의 죄악을 직면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도 보인다.

 

나오는 말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이 놀라운 확신은 날마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마주함으로 주를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오늘 우리의 하루 중에 개입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기도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평소,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 3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