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41편 /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전봉석 2023. 8. 4. 09:30

230806 주일

시편 141편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 141:5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 141:8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시 141:9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 141:10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들어가는 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인생에서 우린 뜻하지 않은 난관에 자주 부딪친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절실하고 절박해진다. 오늘 시편은 악인의 함정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다윗의 시다. 늘 그렇듯 다윗은 항상 쫓기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그때마다 저로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고함으로였다. 곧 우리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묵상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이보다 난감한 일도 없을 것이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총으로 무장한 인생이어서 오히려 그런 상황에 ‘자신의 영혼을 반성’하고, 어떤 경우에도 직접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였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자의 자세였다. 가령 저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맞서지 않았고, 피난길에 쫓아오며 저주하는 시므이를 직접 상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삼하 16:9-10).”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다윗은 오늘 박해받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다. 시적배경은 사울을 피해 엔게디 동굴에 있을 때였거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망하였을 때이다. 다윗은 늘 극한의 핍박 속에 살았고, 그럴 때에도 사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나님께 주의 뜻을 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 시이다. 하나님께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로 아뢰는 말들은 기도이다. 설령 우리가 속에 담긴 저주를 퍼붓는다 해도 이를 사람에게 하면 저주이고, 하나님께 아뢰면 간구이다.

 

오늘 다윗은 극한 상황에서 순결을 유지하도록 간구한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141:4).” 이를 위해,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5).”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3연으로 나뉜다. 1연(1-2)은 여호와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2연(3-7)은 여호와께 향한 충성을 다짐하고, 3연(8-10)은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이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모범답안 같은 기도다.

 

1. 하나님의 도우심(1-2)

 

항상 되풀이 되는 일상에서 기도는 느슨하기 십상이다. 어떤 긴급하고 특별한 일이 있기 전에 규칙적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기는 어렵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1).” 하는 부분에서 어떤 절박함이 느껴진다. ‘속히’ 하고 바랄 때는 ‘서두르소서’ 하는 의미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70:5).” 여기서의 ‘가난과 궁핍’은 물질적인 의미도 있고, 영적인 곤고함도 있다. 이를 예수께서 이르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하셨다.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는, 영혼의 ‘가난과 궁핍’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따르게 한다. 마치 숨 쉬기 어려울 때처럼, 어떤 곤고함으로 죽을 것 같을 때, 하나님 없이 단 몇 분도 견딜 수가 없을 때, 오늘 다윗은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2).”

 

여기서 ‘주의 앞에 분향함’은 ‘기도가 주께 드려지는 향기처럼’ 되기를, 그리하여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기도, ‘나의 손 드는 것’은 기도가 온전히 드려지기를 바라는 의미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제단 위에 제물을 태워서 ‘기름과 향’으로 올려드리는 ‘매일의 희생’을 의미하였다. 이때 ‘저녁 제사’와 ‘아침 제사’가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주께 올리는 향기나는 소제(素祭)이다.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에 한 것처럼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지니(출 29:41).” 냄새 곧 향기로 아침을 열고, 저녁을 마형기로 무리하는 것으로,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30:6-7).”

 

이를 일컬어 바울 사도는 우리 일상을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안 하고, 안 믿는 자들을 우리가 어찌하겠나!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사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130:7).”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곧 이는 사랑의 명령이다.

 

2. 우리의 결단은 장성해 가는 신앙의 과정이다(3-7)

 

결단하기 무섭게 허물어지기 일쑤라 해도, 다시 또 결단할 때 그때마다 성령은 함께 하신다. ‘작심 3일’이면, 3일마다 작심하면 된다. 그러는 동안 우리 신앙은 자라간다. 더디다 해도 성장은 지속된다. 오늘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3).” 이에 우린 크게 공감한다. 늘 알지만 세 치 혀를 다스릴 수 있으면 온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낫다. 우리 입술에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있다. 예수님은 한탄하시길,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실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3-15).” 하는 말씀에서 우린 과연 자유로운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또한 악인과 타협하지 않으리라는 결단,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4).” 실제 사회생활을 하면서 안 믿는 자와의 교제는 피할 수 없다. 그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저들의 말에 동조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오죽하니 야고보 사도는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그런 우리가 스스로 안 믿는 자와 있을 때 입술에 파수꾼을 세울 수 있을까?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39:1).”

 

결국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 21:23).” 따라서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5).” 여기서 ‘의인’을 강조함은 곧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동반자, 신앙의 스승이 나를 칠 때, ‘은혜로 여기며’ 이를 히브리어로 ‘예헬르메니 차디크 헤세드’라 하는데, 직역하면 “의인이 나를 치게 하소서. 그것은 호의가 될 것입니다.” 하는 뜻이다.

 

책망과 훈계가 사라졌다. 부모나 선생이 아이를 함부로 나무라지 못한다. 앞서 히브리어를 조금 더 분해하면 ‘예헬르메니’는 ‘부수다’, ‘두들기다’ 하는 의미다. 곧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한두 번 계속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되며, 인격은 운명이 된다.’는 의미다. 주의 뜻을 살피며 신앙 안에서의 책망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성도는 성숙해져간다. 상대적으로 신앙으로 권면할 때 이를 감정적으로 들으면 신앙은 퇴보한다. 그럼에도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교회의 삯군 목사들이 인기 있다. 직업군의 하나로 목사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이르시길,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 책망도 상대를 보고 해주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오늘 다윗은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하는 매우 성숙한 자세를 보인다. ‘머리의 기름’ 같이 여긴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귀하고 중요한 손님이 방문할 경우 최고의 예우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래서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 26:7).” 이는 전적인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다. 곧 ‘의인의 책망’을 ‘존중과 사랑’으로 받을 수 있는 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하여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이는 ‘심지어 그들의 악행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또는 ‘내가 계속적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나의 기도는 계속될 것이라는 결단의 극치다. 흔히 그럴 때 실망하고 돌아설 텐데, ‘의인’에 대하여 설령 그의 책망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하며 저를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뜻이다. 책망이 상처가 되었을 때, 묵묵히 기도함으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또한 “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6-7).” 이 두 구절은 상당히 난해하다. 문맥도 맞지 않고 연결도 애매하다. 여기서 먼저 “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할 때, 재판관은 통치자를 일컫는데, “그들의 재판관들”은 ‘의인’을 지배하고 있는 부조리한 사회적 제도와 문화적 갈등으로,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는 것은 부조리한 것을 배척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듯 신앙의 지조를 지킬 때,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하는 것은 악한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도 의인들의 책망을 들을 것이라는 의미다. 당장은 그게 불가능한 것 같아서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 의인의 말을 듣고 바른 길로 가는 자신의 ‘부스러진 흙덩이’처럼 여긴다 해도 오히려 언젠가는 그 흙이 옥토가 될 것을 믿는다는 의미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해골이 음부 문에 흩어졌도다’‘악을 막아내는 데 있어 뼈를 묻겠다’ 하는 엄청난 결단이다.

 

이를 이사야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다시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꾼다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곧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오늘 우리가 당하는 신앙적인 어려움이 우릴 영적으로 성숙하게 할 것이다.

 

3. 전적인 의지(8-10)

 

다윗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강화한다.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험을 주께 아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적으로 주를 의지한다. 오직,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8).” 비록 상황이 절망적이라 해도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환난이 우릴 소망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9).” 하고 다윗은 간구하면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10).” 하고 주가 행하실 정의를 바라였다. 살면서 사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신앙을 무력화하는 여러 유혹과 공격을 받는다. 덩달아 우리 안의 탐욕과 시기심도 한 몫 한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우린 때론 사면초가(四面楚歌)다. 그럴 때 우리는 외톨이가 되고 형제에게도 미움을 받는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 근신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나오는 말

 

우린 생각처럼 강하지 못하다. 스스로 옳다 여길 때 넘어지기 일쑤다. 이때 우리는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8).” 하면서 주를 바라야 한다. 나아가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9).” 하고 간구해야 한다.

 

다윗은 다른 시에서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시 37:35-36).” 하며 저들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에 다윗의 찬양대장 아삽은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73:20).” 다윗을 닮았다.

 

결말을 안다면 두려워할 게 아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럴 때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오늘 다윗은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하면서 매순간을 결단하고 또 결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