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3 주일
시편 142편
다윗의 영성기도
시 142: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 142: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들어가는 말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영성은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온유’하며, ‘애통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애타게 찾게 될 때 우린 간절해진다.
오늘 시편은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피해 굴에 도망하였을 때’ 지은 것이다. 그때가 아둘람 굴(삼상22:1-2)이었는지, 엔게디 굴(삼상24:1-2)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살면서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을 맞곤 한다. 그럴 때 누군가를 만나 ‘한숨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하지만 다윗의 영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하나님으로만’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하려고 하였다. 즉 ‘하나님만이 나의 보호자가 된다는 확신’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더해준다.
비슷한 상황의 시편 57편에서도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2-3).” 그렇다고 다윗이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게 아니다. 다윗은 지극히 단순하였고 인간적이었으며, 불안과 염려도 많았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회개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하는 확신을 늘 갖고 있었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비탄 시라 할 수 있다. 극도의 불안과 근심에 잠겨 숨기지 않고 탄식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 시편은 또한 ‘마스길’로 정해진 교훈시다. 다윗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사울을 몇 번이고 죽일 기회도 있었다. 사울이 굴속으로 혼자 들어왔을 때도, 전장에서 잠이든 사울의 천막 안에서도 저는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국민들도 호응할 거였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맡겼다. 적극적이고 솔직하게 아뢰며 기도하였다. 다윗의 기도는 때로 거침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다윗의 영성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였다.
시적구조는 3연으로 구성되었다. 1연(1-3a)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크게 외쳐 아뢴다. 2연(3b-4)은 비탄에 섞인 심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토로한다. 3연(5-7)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의 구체이심을 알고 주 앞에 청원하고, 서원하며 장래의 소망을 담고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순서에 따라 말씀을 따라가면서 다윗의 영성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가져오길 바란다.
1. 기도는 하나님께만(1-3a).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1).”
간절함은 정성스럽고 지극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간절함은 절실함으로 채워진다. 절실함은 그 마음이 뼈저리게 강렬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절실함은 절박하다. 절박함은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지경의 상태다. 여기서 우리의 평소 기도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죽을 정도로 응답을 바라지는 않는다. 절박하다고 하나 스스로 자기 살 궁리는 하고 있다. 우리의 적당함이 기도를 덜 간절하게 만든다.
다윗은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하나님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이는 은총을 구하는 것으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시 30:8).”
① 하나님께 가까이 닿기를 바랐다.
② 하나님이 그런 저를 돌아보시기를 바랐다.
③ 그것은 날마다 다르지 않았다.
④ 이를 세상이 알기를 바랐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기도에서 다윗의 영성기도가 드러난다. “여호와 앞에서 내가 간구한 이 말씀이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시옵고 또 주의 종의 일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을 날마다 필요한 대로 돌아보사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왕상 8:59-60).”
그렇듯 다윗은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2).” 하고 오늘 밝힌다. 숨김이 없다. 원통함을 그대로 토로한다는 것은 ‘묵상과 기도’를 뜻한다. 평소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민을 아뢰는 사람은 이 기도의 의미를 안다. 다른 사람에게 넋두리하지 않는다. 다른 궁리를 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우리의 ‘원통함’을 ‘기도’로 연결 짓는다. 곧 원통한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다윗은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3).” 하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는 그 의미가 심리학적으로도 ‘덮다’, ‘숨기다’는 뜻으로 ‘옷감 따위로 덮어두다’ 하는 의미로 자기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알아서 ‘고통 속으로 숨는다’는 의미다. 탄식하다, 연약해지다, 하는 의미들을 모두 안으로 눌러 감추어서 슬픔을 곪아 썩게 만드는 것이다. 겉으로는 참을성 많고 무던한 사람 같이 보이지만 어느 순간 눌린 자아는 자식에게, 또는 화풀이 할 대상에게 표출된다. 가령 아내가 남편에게 외면당하는 감정을 자식에게서 보상 받으려는 심리와 같다. 다윗의 악장이었던 아삽은 불안하고 근심하는 심령 그대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77:2).” 즉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
2. 절망 가운데 주를 찾는 기도(142:3b-4).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3b).”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는 의미는 ‘주께서’ 곧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내 길-은 우리가 사는 한 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의미한다. 다윗은 항상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4).” 여기서 오른편-은 법정에서 증인이 서는 자리를 암시한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대가 하나님이 아니면 없다는 고백이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곁에 모시고 살았다. 그때마다 오른편에 계셨다는 체험을 저는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16:8).” 하고 담대하였다. 상대적으로 악인들은 그들의 오른쪽에 사탄을 두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109:6).” 하나님을 오른편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확신한다.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31).” 이러한 확신으로 무장한 다윗은,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110:5).” 이는 모두 다윗의 영성기도이다.
우리가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서도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121:5-6).” 이러한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우린 평소에는 그럴듯한 신자 같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는 오만잡신에게 빌고, 도움이 될 사람을 찾아가 떠들어댄다. 사람을 붙들고 넋두리하거나 푸념을 일삼는 일은 성도가 할 짓이 아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를 의지하며 서로가 중보하며 그 고통을 같이 지는 것이다.
3. 하나님께 구원이 있다(5-7).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5).”
여기서 나의 분깃-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유산이 하나님 그 자신이신 것’을 의미한다. 가령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곧 우리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다 레위인들이다. 부르심의 소명을 받았고, 주께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분깃이 따로 없다.’ 가령 목사가 자신의 것으로 교회를 사유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나아가 성도로 산다면서 부자 되길 아귀다툼하는 자라면 저는 악의 뿌리에서 났다. 성경은 단호하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그러므로 우리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곧 우리의 분깃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만족해야 한다. 살면서 자기 것을 소유하려 할 때, 안 믿는 자들과 같이 경쟁하며 아귀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다. ‘교회’를 두고 소유권 다툼을 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를 사유화하여 자식에게 물려주려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교회가 규모가 생기면 당회를 구성해야 하고 후임은 교회 구성원들이 한 마음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
다윗은 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6).” 여기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하고 아뢰는 것은 자신이 ‘매우 낮은 곳으로 데려감을 당한다’는 뜻이다. 저는 왕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도 저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저는 위축되고, 불안한 심정을 드러낸다. 비천하다는 것은 지위나 신분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이 아무리 왕이라 해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산다 해도 ‘비천하다.’
또한 다윗은 영혼의 문제까지 끌고가서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 흔히 옥은 자유가 억압된 곳이다. 비참한 상태로 고립된 상태다. 흔히 우리가 극한 어려움을 겪을 때 이와 같은 심정이 든다. 하여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107:10-11).” 설마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겠나? 설마 바울이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게 하나님이 버리실 것이라 여겨서 하는 소리였겠나? 우리가 믿는 자라면 늘 ‘흑암’을 염두에 둔다. ‘사망의 그늘’을 곧 죽음을 목에 걸고 산다. 언제라도 주가 오라하시면 우린 죽을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하고 절실하게 바라며 사는 것이다.
오늘 다윗의 영성기도는 박해를 통해 성숙해진 결실이다. 하나님으로만 유일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확신하는 기도다. 그래서 욥은 극한 고난의 상황에서 확신을 잃지 않았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 놀라운 고백은 평소에 다져진 ‘묵상과 기도’의 수준이다. 오늘 다윗은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1).” 결코 허튼 데 기웃거리며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다윗은 저의 영성기도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바울은 이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러므로 다윗의 성숙한 영성기도는 확실하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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