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호 9:1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 119:140, 147-148
오늘 호세아서는 지도자들과 선지자(7-8), 제사장과 방백(15)들의 타락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백성을 신앙적으로 인도할 사명이 있다. 첫 구절,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하고 타락할 수 있는 환경적인 요인을 알린다. 곡식을 수확할 때,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사 9:3).” 죄의 자리가 행복인 줄 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먹을 양식을 거둔다는 데서 기쁨이 있다. 이를 기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맥추절(출 23:16)과 오순절(레 23:15-21)과 수장절(출 23:16)이라 하는 초막절(레 23:34-43)을 지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추수의 기쁨이 하나님을 떠나 불의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호 2:5, 9).”
그러므로 하나님은 양식이 고갈 상태에 빠지도록 할 것이라, 추수 때에 기뻐하지 말라고 하신다(2:9-13). 행음하여 바알(2:8)과 기타 목상(4:12)들이나 금송아지 우상(8:4-5) 등 다른 신을 섬기며 즐거워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참나무나 상수리나무 아래서 섬긴 것은 아세라 우상도 숭배한 증거다.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호 4:13).”
오늘에도 이와 같아서 우리의 영적 우상숭배는 여전하다.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호 4:14).” 또한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렘 2:20).” 이는 결국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 싫어하면서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이는 구약 시대에나 신약 혹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풍습에 따른 답습이 죄의 자리를 펼치게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행복의 기준이 세상 사람과 다를 게 없을 때 우리는 휘둘리고 저들을 따라 행하기 십상이다. 이는 결국 염려 때문이다. 사는 데 따른 염려와 근심이 끝이 없다. 기도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마음은 요동을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그러니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어찌 아니 염려할 수 있을까? 그 답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먼저와 나중의 원리에 있었다. 나는 태연한 척 해도 마음은 어렵고 속상하다. 누구에게 말로 한들 누구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나는 나의 고통으로 누구를 생각하며 마음이 쓰였다. 저는 혼자 기형적인 몸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산다. 얼마 전 허리 수술을 하네 마네,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좀 더 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주의 말씀처럼 ‘먼저와 나중’을 분리할 때 그와 같은 문제는 정리가 된다. 그러면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곧 내가 누구인가, 하는 올바른 정체성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7-28).
결국 사람을 믿고 사람을 따르는 자는 주가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이를 추수 때에 알기란 쉽지 않아서 그와 같은 즐거움에 부화뇌동하는 일은 흔하겠다. 하나님의 축복과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은 다르다. 그럼에도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잠 1:28-30).”
나는 하나님의 침묵이 두렵다. 주가 나를 외면하신다 생각하면 오금이 저린다. 전에 알지 못하던 마음이다. 아니 그때는 내가 주를 멀리하며 저를 피해 살고자 하였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또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때도 있다. 믿는다고는 하면서 전혀 안 믿는 자들보다 더욱 서슴없이 죄를 일삼고 살았던 때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그런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취하여 강권하심으로 이끄신 것이었으니… 그땐 그렇게 세상에 놓고 오는 것들이 서러웠다면 오늘은 오늘의 염려와 고통으로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 늘 어디가 아프다는 것, 그로 인해 저절로 ‘나의 아버지.’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우리 삶에 ‘찔레와 가시 덩굴’이 누구에겐 화가 될 수도 누구에겐 복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말씀 6절,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즉 그동안 귀하게 여기고 살았던 것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
‘찔레와 엉겅퀴’는 오늘의 나로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바로 그 앞서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11, 13).”
곧 오늘의 어떤 어려움이 우리의 일상을 쥐고 흔들 때 그것으로 우린 가지런해지는 마음을 경험한다. 나는 요즘 아픔과 근심으로 주께 집중하게 된다. 아내는 곧 이사를 앞두고 부산하다. 동대문에 있는 장모의 집도 사려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1, 2년 사이에 얼마가 빠졌지만 더 손해를 감수하고 버틸 것인지, 이참에 정리하고 넘길 것인지… 서로들 말이 오갈 때도 나는 그런 이야기가 와 닿지 않는다. 실질적인 육신의 고통은 사람을 겸비(謙卑)하게 한다. 자신을 낮추어 겸손할 수밖에! 누가 억만금을 준다 해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가시 덩굴’은 하나님의 개입이다. 내게 두시는 고통으로 인하여 나는 더욱 주의 말씀을 붙들게 하신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119:140, 147-148).
목을 가누기 어렵고, 허리에 통증이 일고, 어깨에 힘이 없다. 무릎은 아프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서 어디 누워 쉬고만 싶다가도… 그래서 나의 이 시간을 사랑한다. 더는 글을 쓸 수 없을 때까지는, 더는 앉아서 말씀을 되새기지 못할 때까지는…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오늘도 말씀으로 먼저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는 아버지. 이스라엘의 타락과 그에 따른 가시와 엉겅퀴를 보며,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낍니다. 끝내 돌아서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주를 멀리하던 때에 기어이 나를 꿇려 주의 사랑을 돌아보게 하신 아버지. 그땐 정말 그게 싫었습니다. 죽기보다 싫어 울면서 주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이끌렸는데…. 아버지.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 이젠 주의 그 사랑하심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행여 나의 고통으로 주께 감사하고 주의 말씀을 잊을까 무섭습니다. 나의 아버지. 노아를 그 긴 기다림에 놓아두셨던 아버지. 아브라함을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길에 놓아두셨던 아버지. 다윗을 항상 쫓기게 하여 광야로 내몰아두셨던 아버지. 저 믿음의 선친들은 어떻게 끝까지 주의 말씀을 신뢰하고, 저버리지 않고 주를 바랄 수 있었을까요? 나의 아버지. 나는 소박하게도, 새벽에 이 시간을 더는 바랄 수 없을까봐 무섭습니다. 아파서 아픔으로 구원의 기쁨을 저버릴까 두렵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19:137).
주가 나를 어찌 하신다 해도 주는 옳으십니다. 나의 아버지, 나를 죽이신다 해도 주는 선하십니다. 저도 욥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믿음으로, 말씀이 있는 새벽을 사랑합니다. 아버지,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주의 의와 진실하심으로 나의 날 동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의 판단은 옳으십니다. 주는 의로우십니다.’ 나의 어려움과 고통이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심을 알게 합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40).
그리하여,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147-148).
왜냐하면,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42-143).
그리하여,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154, 159-16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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