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전봉석 2023. 10. 16. 05:3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학 1:7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 7:10

 

 

다리오 왕은 B. C. 521-486년 동안 다스렸다. 다리오 왕 이 년, B. C. 520년의 일이다. 고레스가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하여 포로 되었던 유대인을 귀환시킨 것은 B. C. 538년으로부터 무려 18년이 지났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18년 동안 성전을 재건하지 못했다. 선지자 학개는 이를 지적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자신의 말씀을 계시하셨다.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에 속한 여호야긴의 자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이다. 여호수아는 분명히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손이었다. 저에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하고 전한다. 학개가 예언할 당시는 바사가 맹위를 떨치며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는 보잘것없는 국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비록 유다가 외적으로는 보잘것없을지라도 바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강조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학개는 말씀을 듣고 전한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13).” 곧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의 말씀을 듣게 한다. 예수님도 그러한 시간을 가지셨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곧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사는 일이다. 서로가 그리할 수 있도록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12).” 이와 같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우린 우리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오늘 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기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는 것은 스스로 그리 판단하여 후순위로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마다 우리가 우선해야 할 일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왕하 22:13).” 결과적으로 우리가 행동하기를 미루는 일은 우선순위를 다른 데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이라 하시는데 우린 늘 ‘아직’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믿음의 사람들의 행적을 살피면 저들은 항상 말씀을 우선하였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더하는 말없이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창 22:2-3).” 저의 순종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이와 같이,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119:60).

 

하는 삶이 오늘 나에게도 필요하다. 나의 고질적인 ‘생각하기’는 ‘행동하기’를 미루게 한다. 이는 핑계다. 신중하다는 이유로 말씀을 따르는 데 더디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하심으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이러한 신앙과 결단이 나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 이를 위해 말씀을 따라 사는 게 중요하겠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행여 우리의 삶이 입으로만 경외하는 삶이라면 어떨까?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습 3:2).” 곧 오늘 나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두느냐 하는 데서 그 행함은 결정되는 것 같다.

 

누구에게 무얼 이를 때 요즘은 이를 자주 회피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 말하고 난 뒤 저의 외면과 서로의 불편함을 의식해서다. 어떤 이가 무슨 말을 할 때 그 말이 듣기에도 거북하고 안 믿는 가족들도 있어 이를 제지시켰다. 그러다 저의 자존심은 상했다. 누구라도 자기 말에 두둔하고 호응하길 기대한다. 어지간하면 나는 그러려니 하고 마는데 때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건 아니라고 하면 졸지에 서로의 좋은 사이는 껄끄러워진다. 순간 갈등하는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있어야 하는 일인지, 그래도 말씀을 따라 전해야 하는지.

 

하나님은 주저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우리가 주저할 때 주는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신다. 나는 더러 누가 기도하다 누구의 뜻으로, 무얼 들었다 하는 식의 표현을 싫어한다. 조심스럽지만 두려운 일이다. 사실이라 해도 이를 전하는 일은 예외적이다. 한데 어느 교회 목사는 예언의 은사가 있어 안수하고 기도하며 앞일을 마구 이른다. 듣다보면 점술가 같다. 내가 이를 경계하는 것은 성경이 곧 예언의 책이다. 말씀에 나와 있고 이 말씀을 상고함으로 주의 뜻을 얼마든지 전할 수 있다. 성령이 하실 일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듣는 이나 하는 이나 뭔가 좀 더 자극적인 형태를 원하는지… 나는 누가 누구에게 기도 받으러 간다, 하면 이를 옳지 않게 본다. 또는 목사나 어떤 은사를 내세워 함부로 안찰하고 안수하며 뭐라 이르는 소위 ‘예언의 말’을 나는 경계한다. 유난히 이런 데 노출된 심령이 있다. 이를 갈구하며 누구는 여기저기 ‘용하다는 곳’으로 떠돈다. 어떤 때는 무슨 기도원에 가 있고, 어떤 때는 어느 목사를 맹신한다. 상대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여 가족 중에 누가 어떻고, 앞으로 뭐가 어떻고, 어떤 일이 어떻고… 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를 따르며 귀 기울이는 사람이나 이를 이용하여 사람을 규합하려는 사람이나.

 

보면 저들은 상대적으로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에 약하다. 자신이 없다. 말씀의 확신이 없다. 그러니 남이 하는 말에 혹한다. 누가 어떻다더라, 하는 소문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 예수님은 이를 미연에 방지하시며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이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26).”

 

어째서 그러한가 했더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정작 우리는 완성된 예언의 말씀, 성경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성경이 완성되지 않던 시절, 말과 말이 주의 뜻을 전해야 하던 시절에는 설령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다. 성경의 시대다. 혹자는 성경은 아직 미완성이라 저마다의 해석이 있어야 한다며,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스스로가 은밀하게 들은 것이라며 전한다. 보았다고 하며 말한다. 이런 데 혹, 하여 마음이 갈등하는 심령은 그만큼 주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산다는 반증이다. 그러다보니 자꾸 누가 그러는데, 어느 책에서… 하는 따위로 다른 참고 문헌이나 사람을 들먹인다.

 

실은 누가 내게 어떤 말을 해주면서 앞에 그렇듯 자신이 기도하는데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면 될 것을 마치 하나님이 그리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의미의 말씀 전달은 우리의 일상에서 바람이 불고 숨을 쉬고 하늘을 보는 일처럼 서로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믿음의 집을 세워야 한다. 오늘 4절,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고 보니 다들 자기 살 궁리에 온통 더 관심이 크다. 예민하게 여기는 부분을 사탄은 공략한다. 저들이 성전 재건을 18년이나 미루고 있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누구라도 어디서 누구한테 기도 받았다, 누가 예언의 은사가 있다, 하는 따위의 것에 연연하게 되는 것은 나름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 하지만 말씀을 차치하고 자신의 판단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자식이니, 가족이니 하며 더 중히 여길 때 이를 공격하며 사탄은 그에 맞는 ‘어떤 이의 말’로 귀를 만족하게 한다. 누가 교회를 옮기고 또는 교회에 헌신하는 일에서 그래서 뭐가 어떻다, 하며 기도 중이라 할 때 나는 사실 속상하였다. 우리의 우선순위에 따라 마음은 조석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하여 시편은,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59-60).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 3:40-41).” 쓸데없는 판단이나 생각은 접어두고 말씀 앞에 잠잠할 수 있다면, 어제 묵상하였던 말씀처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로 충분하지 못할 때, 용하다는 사람을 찾기 마련이고 직접적으로 그리 예언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여 오늘 말씀으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 1:7).”

 

앞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라 하시는 말씀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서 그리 행해야 한다. 이는 “하늘에 계신 (우리 마음과 손을) 하나님께 들자” 하시는데, 이를 위해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는 애가의 말씀이 마음을 울린다. 만일 그리하지 않으면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레 26:20).” 극단적으로 내가 아는 누구는 여전히 그러고 산다. 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데, 지금 같이 사는 이의 아이는 아닌 것으로 안다. 저는 학창시절부터 오늘까지도 어딜 그리 배회하듯 ‘안수 받고 기도 받으러’ 다닌다. 아, 그래서인지, “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21).”

 

나는 두렵다. 설령 누구에 대해 어떤 마음이 자주 든다하여 이를 하나님의 전언인 양 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저에게도 말씀으로 찾아가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말씀을 전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나의 생각을 말하는 일보다 옳다. 내가 소극적이어서가 아니다. 누구를 통해 주의 뜻을 대언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야말로 영매가 필요한 사이비적인 교훈의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1-2).

 

우린 저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할 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7:1)

 

‘나의 하나님’을 찾게 된다. 결국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그러므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셀라)

(3-5).

 

나와 하나님의 문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내가 아뢰어야 하고 내가 들어야 한다. 말씀이 내 손에 있다. 결국 우리의 견딤은 우리 개인의 것이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에,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0).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