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전봉석 2023. 10. 17. 05:16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3-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4-5

 

 

‘칠 월 그달 이십일 일’은 귀환한 유다가 성전건축을 시작하기로 한 날부터 거의 한 달이 지난 때이다. 또한 추수를 마치고 지키는 절기인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셨다. 이는 ‘남은 백성’을 향하는 말씀이다. 주가 물으신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학 2:3).”

 

말씀은 언제나 시의적절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바람과 같아서 임의로 행하시는 듯하나 모든 게 다 이유가 있다. 주의 부르심에 응하고 난 뒤부터 이 일은 뚜렷하여서 몰아치듯 사람을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하던 일을 좌절시키기도 하시면서 결국은 주의 뜻을 이루게 하신다. 신대원 1, 2학기가 끝나면서 각자의 교회사역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얼떨결에 글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시작되었다. 누구는 이를 놓고 만반의 준비와 함께 여러 날 기도하며 대비한다는데 그야말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것을, 그렇게 남은 학기를 다하고 졸업을 앞두고 일곱 명의 아이를 세례교인으로 세웠고, 정식으로 교단에 입적하여 어엿하게 세무등록까지 마쳤다. 한동안은 주일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아이들과 모여 예배를 드렸고, 그러다 어느 순간에 모두들 흩어지고 ‘남은 자들’만으로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인천으로 옮겨올 때도 모든 일이 얼결에 일사천리로 이뤄지고… 이번에는 주안으로 이사를 하면서 집 문제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나 역시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늘 그렇듯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감추신다. 모든 일이 되어질 때 나는 가만히 주가 하시는 일을 본다.

 

개인적으로는 주안으로 가는 것을 꺼렸다. 중고등학교 때 자랐고 생활하던 곳이다. 아버지가 인천으로 개척을 하며 오면서 교회를 이룬 곳이 지금 이사를 가는 곳과 가깝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더 크고 더 좋은 곳에 계약을 마쳤고 이번 토요일에 이사를 한다. 교회는 어찌해야 할지, 나는 가만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볼 뿐이다.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집도 교회도 나는 가진 게 없이 시작하고, 옮기고, 그리 된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그저 말씀으로였고, 말씀으로만 붙들려 있고 이를 지킬 따름이다. 기이하나 주가 다 하신다. 말씀은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잠 1:3-5).”

 

내 마음에 어떤 불안이 또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데 주는 행하신다. 때가 되면 주가 움직이심을 나는 늘 가까이서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사 32:2-4).” 주가 행하시는 데 있어 나는 증인으로 선다. 이번 이사에 있어서도 나와 상관없이 내 주변의 모든 상황과 여건이 그리 모아졌다.

 

그때마다 내가 할 일은 불평과 불만을 삼가는 것이다. 주안으로 이사하는 것이 꺼려졌던 것이 돌고 돌아 다시 어릴 적 아버지의 목회지로 오는 것 같았다. 더하여 학창시절의 안 좋은 기억들이 잠재의식 속에서 방어전선을 펼치는지, 마음이 저 혼자 불편하였다. 처음 계약한 집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어그러지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앞장서서 모든 일을 추진하는 아내가 발을 동동 구르는데도 나는 실제 잘 됐다 싶었다. 그랬던 일이 일주일 만에 뒤집어지면서 더 좋고 더 넓은, 공부방이며 예배를 드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으로 연결되었다. 가만히 바라보는 입장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기묘하다. 현장에 있던 부동산 사람 역시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 1:28-29).”

 

아들이 거처하던 오피스텔도 엊그제 주일에 만기가 되어 월요일에 연장을 하거나 빼주던가 해야 했는데, 어제 모든 일처지를 끝내고 아들 먼저 이사할 집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다 아구가 딱 맞물리듯 일은 진행이 되었다. 오늘 본문이 이르신다.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하신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3-4).”

 

“너희 가운데 남아 있는 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하고 물으실 때 만감이 교차한다. 가진 것으로나 현재 남은 사람으로는 교회를 이뤄간다는 게 보잘것없어 보인다. 한데 말씀은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하시며 독려하신다. 나는 사실 아무 것도 모른다. 하나님이 어찌하실지, 내가 가진 것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하나님은 아신다. 이를 인정할 때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여건을 동원하셨고, 그리 되게 하셨다. 남들은 ‘작은 교회’로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하여 개척교회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데,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은 여전히 작은 교회, 한 영혼이다.

 

한 영혼을 소홀히 할 때, 나도 없다. 우리 모두는 제외가 된다. 우리 모두는 한 영혼으로 주와 동행한다. 나는 이를 어찌해야 할까… 갈피도 잡지 못하고 있으면서, 다만 오늘까지 주가 이루어 오신 것처럼 주가 또한 이루어 가실 것은 안다. 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옮기거나, 누굴 붙이시거나, 때론 혼자 골방에 두시거나… 모든 상황 가운데서 내가 붙들 것은 말씀으로였다. 고상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 나로서는 할 게 없어서 말씀으로만 붙들리기를 필사적으로 한다. 혼자 뭐하나, 싶게 묵상을 글로 쓰고 설교원고를 일주일 내내 작성한다. 어떤 이의 일을 두고 말한 이도 말해놓고는 등한히 하는데 나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하시는 말씀에도 일치한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라!

 

나는 그 어떤 능력도 없는 것에, 오히려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 쩔쩔매는 위인이란 게 때로는 참 다행이다 싶다. 나서고 싶어도 나설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누가 그토록 ‘동굴’에서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더니, 하나님은 저의 기도에 응답하시려는가? 나는 어제 그와 통화하면서 그런 얘길 잠시 했다. “이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하시는 질문 앞에 나는 턱을 괴고 앉아 대답할 말을 생각하다 주를 바란다.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는 이를 주께 바랄 뿐이다.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나로 오늘까지 이르게 하심은,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 주가 나를 부르셨고, 세우셨고, 사랑하심을 세상으로 알게 하실 것임을.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하여 주님은 약속하시길,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곧 내가 한다고 여겨 오늘까지 이른 것이면 얼마나 스스로를 높였을까? 나는 한 게 없어, 처음 글방이 교회가 되던 그 시절의 나와 다르지 않다. 나에게 주의 일은 얼결에 이루어진다. 그러니 남은 작정기도를 하고, 무얼 빌며 동분서주한다는데 나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목격하고 감탄할 따름이다. 정말이지 나만큼 주의 은혜 가운데 살아온 자가 또 있을까? 오히려 일이 복잡하여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말하고, 감정이 상해 돌아앉아 있을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계셨다.

 

‘남은 자’가 한둘이라 숫자로 치기도 민망하나 나는 그때마다 백 명 만 명을 놓고 설교하듯 하였고,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설교원고 작성하는 데만 공을 들였다. 더러는 뭐라도 하라며 나를 뭐라 했고, 누구는 ‘동굴’에서 나와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기도하였다. 곁에서 난리인데 정작 나는 하나님께 묶여 꼼짝 마라, 하심이었으니 그 속을 누가 알아줄까? 그러자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나는 한 게 없는데 나로 이 귀한 사역을 맡기신 하나님이 때론 그 자체로 아이러니하다. 그럴 때마다 여러 시험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 같을 때도 나는 태평하였던 것이,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나는 주의 것’으로 놓고 있을 때 가장 담대하였다. 이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주가 이루시는 것을 기어이 자신이 나서서 하려 할 때 사달이 난다. 내 곁의 여럿을 보았다. 부친의 오랜 벗들로도 그들 평생 목사로 사역을 다한 뒤에 곁길로 빠져 ‘피복음’을 운운하는 이도 보았다. 또는 젊은 혈기에 목회를 접고 무슨 비즈니스선교를 운운하며 사업가가 된 이도 보았다. 여전히 낭만을 꿈꾸듯 하며 주의 일을 뒤로 미루며 나이만 들어가는 이도 여럿이다. 그런 거보면 내가 확신을 갖는 것은 말씀으로의 승부다. 나의 사명은 말씀 전하는 자이고, 상한 심령을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나는 비루하나 주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게 우선이란 것을 알았다.

 

오늘 본문 8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 것 아닌 게 없었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할 때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2-23).” 내가 남보다 못한 두 달란트면 어떻고, 심지어 한 달란트였어도 어떻겠나? 하나인 자는 하나만 더, 두 개인 자는 두 개만 더… 그리 자신이 감당할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을. 다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나의 모든 게 주께 받지 않은 게 없다. ‘아픈 아이’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다, 나는 그 친구에게 네 두 아들이 멀쩡하게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한가? 하고 되물었다. 요즘은 정말이지 두 집 걸러 하나씩은 심령이 상한 자로 운신하고 있다. 나로 앞서 어울리지도 않게(?)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굴복시키심은 내 곁의 그런 자들의 위로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종종 누가 어찌해서 연락을 하면 누구 소개로 전화한다 하는데, 저는 의사를 찾는 게 아니라 같은 환자로서(!) 어찌 해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나의 대답은 한 마디를 주를 바라라는 것. 아이가 수시로 고꾸라져 불에도 물에도 뛰어드니 그 어미가 예수 앞에 왔다. 아무도 모르게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붙들었다.

 

우리에게 더하신 이와 같은 은밀한 고통이 축복이다. 이에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나는 불안하고 두렵다. 여기서 안주하며 떠나지 않기를 원한다. 매번 그렇듯 하나님은 임의로 나를 띠 띠우신다.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시 18:32-34).

 

주가 행하심을 알 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8:1).

 

입이 쩍, 벌어지면서 찬송이 저절로 나온다. 나의 지나온 날이 나에게 증거가 된다. 나로 어릴 적 신앙으로 성장하던, 그러나 마음에 어떤 응어리가 있어 학창시절을 뒤도 안 돌아보았던 곳으로 기어이 가게 하시는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거기서 자랐고, 거기서 상처도 받아 주를 멀리하고 살았다. 오늘 시편은 이를 바탕에 깔고 있으신가?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2).

 

도대체 나를 어찌 이처럼 사랑하시는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4-5).

 

나는 다만 가만히 있어, 주가 하시는 일을 본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