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 5:7
구원의 문은 열렸으나 언제까지나 열려있지는 않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하고 부른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습 2:1).”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무감각하여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할 때 수치심도 없다. 이들을 향해 외친다.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이는 오라, 하는 청함보다 ‘굴복하라’ 하는 의미로 읽힌다. 곧 진노의 날인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겠다.
곧 “명령이 시행되기 전” 하나님께서 분노를 행하시기 전에, 또한 “겨 같이 지나가기 전”에,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습 2:2).” 오늘 말씀은 다급하다. 하여 지혜는 말하길,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에게 더하신 날이 곧 닫히기 전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모든 게 다 때가 있어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 3, 8).” 우리는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1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알 수 없으니 이와 같이 묵상하며 헤아려 주의 뜻이 어떠한지를 살펴야 한다. 성도로 산다는 일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말씀을 지키려 하며 겸손을 따라 구하고, 여호와의 날에 숨김을 받는 것이다. 곧 겸손으로 공의의 삶을 추구하는 삶으로 꾸준한 연마가 필요하겠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누가 말하길 나의 이 묵상 글쓰기가 숙제하듯 하는 것은 아닌지, 몇몇에게 보이고 자신이 읽는 것으로 족한 것은 아닌지, 하고 물었다. 그의 본심은 보다 생산적인 글쓰기가 되고 나아가 나의 일상이 드러나서 ‘골방’에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저가 날 위해 기도하며 그리 생각한다는 것에 나 역시 바라는 바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나는 선뜻 어찌 하겠다 할 수 없었다. 곧 이리 두시는 것도 하나님이고 저리 두시는 것도 하나님이실 터, 나의 의지로 믿는 믿음이 있고 은혜로 이끌리는 믿음도 있다. 그러할 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곧 우리가 선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함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안다는 것, 삶으로 살아서 사는 동안에 다가오고 누리는 것으로 이는 사명감으로 부르심에 따른 행함으로였다. 앞서 누구의 권면은 뭐라도 하라는 것일 텐데 열심을 다해 사는 저의 삶에 비추어 나의 오늘은 주의 쓰임에 맡길 따름이었다. 내가 수동적이라 그런지, 나는 스스로의 열심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주어지는 의미부여를 나는 합리화로 본다. 우리의 신앙은 명분에 따른 게 아니다. 오직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 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어쩌면 저의 말처럼 나의 묵상 글쓰기가 숙제하듯 억지스런가? 하고 어제는 그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러웠다. 아니라, 생각하다가도 그런 것 같아서. 그런가? 하고 되묻다보면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다 얻은 결론은 그러하든지 아니든지 나는 이 시간과 이와 같은 글쓰기를 하루 일과 중 가장 귀히 여긴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오늘은 모처럼 3시 반 알람에 놀라 눈을 떴다. 보통은 이미 올라와 묵상글을 쓰다 알람을 누르는데… 화들짝 놀라 성전으로 오면서 내가 이 시간을 어찌 여기든지 나의 하루 일과 중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란 생각을 하였다.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을 부르는 오늘 말씀에서 나는 이와 같은 수동적인 이끌림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 내가 내 의지로 하나님을 주도하지 않는다. 가령 기도를 주도하려 할 때 그 응답은 작위적이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킬 위험이 있다. 누가 평신도 선교사로 나갔다가 목사가 아닌 자신의 신분에 한계를 느껴서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를 몰라서 저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작위적인 신앙이란 자기 생각이나 필요에 따른 것을 마치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 나로 그리 두심은 그리 두신 이의 뜻에 따른 것이지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 때 내게 맡기신 한 영혼인가? 하는 질문과 ‘내 양을 먹이라’ 하심에 주의 한다. ‘네 양을 먹이라’ 하신 게 아니다. 이 차이는 크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나 시간과 마음을 들여 어떤 일을 준행하는 데 있어서도 주께서 이르시는 ‘내 양’과 ‘네 양’의 차이는 다른 의미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나는 이 말씀을 두고 누구를 권면하거나 어떤 일에 관여해야 할 때 기준을 삼는다. 우리의 가장 큰 오해는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하심을 바꾸어 ‘네 양’ 곧 주의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내 시간을, 내 일을, 내게 주어진 날을 악착같이 산다. 안 믿는 자들도 그러하다. 그래서 ‘내 것’이라 여길 때 기껏 열심을 다해 한 일의 성과를 두고 실망하거나 좌절한다. 주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 여길 때 쥐고 흔들려고 한다. 그러나 욥은 그 극한 상황에서도 알았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하면서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
오늘 스바냐는 겸손한 자들에게조차 심판이 행해지는 ‘여호와의 날’을 상기시킨다. 우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하면 안 된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이는 불신앙적인 의미의 진술이 아니다. 선지자 아모스도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암 5:15).” ‘혹시’ 이는 곧 모든 주권이 주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한다. 이어 나오는 도시들 가사, 아스글롯, 아스돗, 에그론은 블레셋 성읍들이다. 이는 백주대낮에, 블레셋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시간에,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것임을 알린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89:14).
모든 시간은 주의 것이다. 이 모든 허용은 주의 시간 속에서 흐른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도 우리에게 허용하신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시침과 초침이 흐른다. 내가 침잠하여 있는 것 같고, 별로 성과도 없는 글쓰기에 만족하는 것 같아도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 내가 족하다 하는 것은 남들처럼, 여느 목회를 하듯, 뭔가 가시적인 어떤 기대나 바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나는 원하나 내게 그리 허용하지 않으심은 주의 의지다. 저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오늘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바로 이 순간이 헛될 리 없다.
나는 다만 주의 양, ‘내 양’을 먹이고, 치고, 먹일 뿐이다. 내 것이 아님으로 누가 오고 안 오고, 누가 읽고 안 읽고, 어떤 성과가 나고 안 나고… 하는 어떤 기준에서 나는 자유하다. 하나님이 하실 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하여,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73:20).
오늘 주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이 내 의지에 따른 게 아님을 잘 안다. 앎으로 나는 주께 맡긴다. 맡김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누구의 어떤 일에 마음이 쓰인다 해도 하나님이 움직이시기를 기다린다. 내가 먼저 나서지 않으려 한다. 내 마음에 주시는 일을 주의 뜻으로 확정하는 일을 성경은 주의 하였다. ‘혹시’ 하고 여운을 두는 것은 그만큼의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만일 이를 자기 믿음에 도취되어 확신한다면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하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 부사어로 ‘그리할 리 없지만 만일에’ 하는 뜻으로, ‘어쩌면’ 하고 여백을 둔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시간, 그의 주권이심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저들은 그만큼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앞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17).” 분명히 확신하나 그러한 확신까지도 주의 주권 아래에 두는 것이다.
때론 우리의 믿음이 너무 당돌하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 마치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진 것처럼 요구한다. 맡긴 걸 내놓으라는 식으로 구한다. 그것을 또 대단한 믿음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 못한 자를 비난하거나 판단한다. 믿음을 신념으로 삼을 때 우린 하나님보다 위에 있게 된다. 자기 결정을 내리고 주의 뜻으로 둔갑시킨다. 그래놓고는 생각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탓한다. 주님이 언제 ‘네 양을 먹이라’ 하셨나? ‘내 양을 먹이라’ 하셨다. 하면 주가 주시는 양이어야 하고, 언제든지 주가 달라면 드려야 할 것이다.
성경의 여러 군상은 오늘 우리의 본보기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오늘 주시는 일련의 사태나 여러 형편과 사정도 주가 맡기신 것이다. 나는 그리 받는다. 하면 그 시간, 그와 같은 상황까지도 내 의지나 노력으로가 아니라 주의 뜻을 따라 먹이고, 다스리면 된다. 우리에게 있어 ‘모압’과 ‘암몬’은 죄요, 교만이다. 그 결국은 당연히,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사 16:6).” 그러므로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 거리가 되리로다(렘 48:26).” 오늘 내 안의 ‘모압’과 ‘암몬’은 여전하여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고함이 그것이다. 이를 다스리는 데 있어 우리는 시편으로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5:1, 3).
그리하여 나는 아주 소박하고 소심하고 소극적이라 해도, 나의 이 아침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아침에,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할 때에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7).
이 놀라운 힘은 가공할 수 없다. 내가 끌어내는 게 아니다. 주가 더하신다. 그리하여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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