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전봉석 2023. 10. 18. 05:35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3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시 9:1

 

 

하나님은 우리로 온전하여지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모든 행사를 주장하신다. ‘다리오 왕 이 년 팔 월’ 곧 B. C. 520년 10-11월쯤에 스가랴에게 임하셨다.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를 살았다. 두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독려하고 성전 재건을 도왔다. 특히 스가랴는 영적 갱신에 보다 실질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3).”

 

학개와 같이 스가랴도 유다의 군주이며 페르샤의 왕인 다리오의 통치년도로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셨다. 선지자란 ‘하나님에 의해 대변인으로 부르심을 받는 자’를 의미한다. 스가랴도 자신을 특별히 선지자로 묘사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확증한다.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이라 소개한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의 뜻은 ‘주께서 기억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며’, ‘적절한 시기에’라는 그들 이름의 뜻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곧 ‘주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기억하사 적절한 시기에 축복하실 것이다.’ 하는 의도로 쓰였다.

 

스가랴는 포로 중에 태어났으며, 이스라엘로 귀환할 당시에는 상당히 어렸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에는 제사장이었다. 그런 그가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슥 1:2).” 하고 첫 마디를 뗀다. 곧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를 처벌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3).”

 

우리 하나님의 진노에 이어 은혜가 언급된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회개를 촉구한다.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을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멀어져 살아온 사람은 돌이켰을 때 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에 우리는 그 증거를 품고 산다. 가령 욥은 그의 고난으로 온전한 자가 된 것이 아니다. 욥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터였다. 하나님의 영광이 고난으로 임하는 것은 욥의 태도에 달렸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마음껏 욥에게 더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망가뜨렸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음으로 주의 영광을 드러냈다. 곧 욥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 것이지 복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내가 아는 한 욥기는 고난의 불가해함을 말하고, 시편은 고난으로 지혜를 삼고 주를 찬송하는 것이 현실임을 알게 한다. 우린 우리에게 더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9:2).

 

주가 나를 사랑하신 증거를 지키고 산다는 일, 이는 곧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이것이 성도로 사는 삶이다. 잠언은 이 삶을 드러내는 지혜서이다. 이에 우린 주변의 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터전에서 본을 삼는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6-7).”

 

우리 신앙의 시금석은 말씀에 따른 순종이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고, 시편은 이를 우리 삶 가운데서 찬양하였으며, 잠언은 이로써 지혜의 출처를 알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오늘의 여러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토대로 산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물처럼 진행되는 일련의 일들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간섭과 주장하심을 경험한다. 아내 역시 놀라워하며 그때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릴 사랑하시고,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가를 발견한다.

 

오늘 스가랴는 회개를 세 번이나 촉구하며 만군의 여호와의 권위를 선언한다. ‘만군의 여호와’ 되시는, 역사의 주권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게 한다. 그렇듯 선지자들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말 3:7).” 이와 같이 회개와 축복은 공식이 있다.

 

그저 그러려니, 조상들도 그리 살았던 것처럼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한다. 그것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4).” ‘악한 길, 악한 행실’은 포로기 이전 열조들의 행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고난이 있기 전에 우린 이러한 사실을 분별하지 못한다. 우리의 안이함이 통상적으로 그래왔던 것에 익숙하게 젖어 산다. 그래서 “내가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살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35:15).”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었다.

 

예수님은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눅 6:46-47).” 우리의 무뎌진 신앙으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예민하게 경험하지 못한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 넘기는 일상의 소소함 가운데 주의 은혜가 숨어 있다. 이를 알리시려 고난으로 우리 일상을 출렁거리게 하신다. 말씀이 항상 살아 있어 우리 삶에 생동감 있게 역사하고 계신 것을 알리신다.

 

여태껏 나는 그저 인복이 많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마다 내 곁의 사람들과 그 되는 일들 가운데 일일이 관여하고 계셨다는 것을 안다. 이번에도 이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막으셨고, 다른 길을 여셨다. 마치 목자가 양떼를 이끄시듯 때론 가로막으시고 난 뒤에 그 너머가 낭떠러지였음을 안다. 돌이켜 주의 길을 가면서는 이와 같은 경험이 삶에서 드러났다.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가 한 게 아니었다.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89:34).

 

주의 말씀은 그렇듯 살았고 생동감 있게 나를 주장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그러므로 내가 더욱 주를 가까이 알고 동행하고자 하여 말씀 곁에 선다. 이는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가령 어제는 전날에 했던 위내시경과 피검사 결과에서 특히 간수치가 위험치에 다다랐음을 의사가 알리었다. 지난 6월까지도 정상이던 수치가 서너 배 이상 높은 수치로 나오면서 운동해라, 먹고 있는 모든 영양제나 약을 끊어라, 한 달간 약물치료로 하고 다시 검사를 해보자, 하며 경고를 주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피로하고 어디가 자꾸 아팠다.

 

일례로 이와 같은 삶의 역동성이 흐트러진 생활을 돌아보고 주의하여 주어진 삶을 살게 하듯 오늘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참 지혜가 무엇인가를 알린다.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슥 1:6).” 나로 나의 삶을 돌아보고 돌이켜서 주의 말씀에 따라 살게 하는 것이 위기에서다.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59-60).

 

이에,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32).

 

하는 시편의 실제적인 찬양이 기도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집을 이사하는 일에서 또한 교회를 어찌할까, 하는 점에서도 나는 생각만 많고 마음만 어수선하였으나 하나님은 앞서 일하시고 계셨다. 모든 게 다 주의 뜻 안에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히 3:15).” 이에 따라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그러므로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20).”

 

성경의 뜻은 자명하고 그 의미는 군더더기가 없다. 미적거리고 생각이 많은 것은 내 안에 다른 생각으로 인함이다. 우리 안에 주의 뜻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또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다. 앞으로 스가랴가 보여주는 8개의 환상은,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그리고 천사의 설명이 뒤따른다. 먼저 네 가지에서 신탁의 말씀이 주어진다(1:14-17, 2:6-13, 4:6-10, 6:9-15). 간단하게, 먼저는 붉은 말을 탄 자와 세 말들에 관한 환상, 네 뿔과 네 공장의 환상, 척량하는 자에 대한 환상,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 순금 등대에 대한 환상,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 에바 안에 앉은 여인의 환상, 네 병거의 환상으로 이어진다. 이 환상들은 모두 하룻밤 사이에 주어졌다.

 

세 번째까지의 환상은 소망을 잃고 낙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신다. 네 번째 것으로는 스스로 용기를 잃은 자를 위해, 다섯 번째 환상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 낙심한 자를 위한 위로가 드러난다. 여섯 번째 환상은 악한 자의 승리로 낙심할 때 주시는 소망이고, 일곱 번째는 세상 모든 악의 세력을 일소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알게 한다. 결국 여덟 번째 환상으로 성전을 재건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는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성경은 이와 같이 우리로 주의 길을 가는데 낙심하지 않도록 붙드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러므로 이를 알 때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듯 이어지는 일상에서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린다. 그럴 때면 나도 묻는다. “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그럴 때면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신다(슥 1:9). 이런 내용은 13, 19, 4:1, 5:10, 6:4 등에서도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13).” 나는 묻고 주는 대답하는 삶이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증거인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하는 부분에서 그 자체로 새 힘을 얻는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 40:1-2).”

 

오늘 내게 더하시며, 나로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심인데, 쇠퇴해 있던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고, 진지한 중보와 미래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따른다. 그리하여 오늘도,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9:1-3).

 

우리가 살면서 전심으로 무엇을 인정하고 느껴본 게 얼마나 될까? 전심으로라 하면 ‘모든 마음으로’ 또는 ‘온전한 마음으로’ 혹은 ‘마음은 다해’ 하는 의미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하여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0).

 

우린 이를 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16).

 

하면,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19-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