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

전봉석 2023. 11. 8. 04:33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20, 22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29:1-2

 

 

‘시험하는 자’가 예수를 시험한다. 첫째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 셋째는 천하만국의 영화를 줄 테니 자신에게 절하라는 것. 이는 기본적인 욕구와 명예와 종교와 사역을 향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어떤 일을 두고 사탄은 시험을 한다. 이는 성령이 주도하시는 바이기도 하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마 4:1, 막 1:12).” 여기서 ‘그 때에’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뒤이다. 곧 하나님의 역사가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은 단순히 믿음이 약해져서가 아니다. 신앙생활이 활동적일 때도 마찬가지다. 감당해야 할 게 중요할 때 그에 앞서 훈련의 차원에서 시험이 오기도 한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곧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0-12).

 

전도서를 본문으로 삼아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생의 고난과 헛됨이 연속이란 사실이 새삼스럽다. 우리 인생이 헛된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하심을 살게 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하여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8).” 그러나 이와 같은 말씀이 앞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님이 시험하는 자를 말씀으로 이기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로 이와 같이 말씀을 붙들고 설 때,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시험은 우리로 더 선명하게 주를 바라게 한다. 시험하는 자의 의도는 주의 말씀을 훼방하는 것이겠으나 공교롭게도 시험으로 우린 말씀을 더욱 의뢰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옳게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울은 이를 알았고,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

 

그때에 우리에게 주가 맡기시는 사명이 부여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이는 차등의 문제가 아니라 역할의 문제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욕망을 따라 살지만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약 3:13-14).” 우리 안에 두시는 지혜와 총명이 선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를 거슬러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15-16).”

 

곧 어떤 역할과 능력이 부여되어 주의 일에 동참하려 할 때 그만큼의 시험하는 자가 훼방을 놓기 마련이다. 가령 누가 ‘다니엘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번에는 작정하여 한 번도 빠지지 않기를 각오하고 시작하였다. 한데 몸살이 오고, 직장에서의 일이 갑자기 바빠지기도 하면서 어떤 훼방하는 세력이 느껴진다고 했다. 오늘 우리 주님은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이와 같은 시험을 당하셨다. 그럴 때 우리가 붙들고 설 것은 말씀이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그러므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19:9).

 

우리가 사는 길에 말씀으로밖에 새 힘을 얻을 수 없다. 다른 어떤 보람과 나름의 수고로는 모든 노력이 헛됨을 지혜자는 일갈한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전 2:1).” 하는 결론을 얻었다. 저는 다 해봤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3, 11).” 그러나 해 아래 모든 것은 무익하였다.

 

말씀 없이는 예수께서도 일하지 않으셨다. 오늘 본문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린 이에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된다. 예수님은 이를 누누이 강조하시며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물론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먹고 마시는 일은 필연적으로 중요하다. 시험하는 자는 이를 알기에 가장 먼저 이를 건드리기 일쑤다. 그러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그러려면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할 터, 사탄은 시편 91편 11, 12절을 가지고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5-6).” 곧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91:11-12).

 

곧 우리의 얄팍한 성경의 지식이 오히려 우리로 올무에 걸리게도 하는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맹인이었더라면 좋았을 걸,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스스로도 안다, 본다, 그리 산다고 할 때에 그와 같은 완고함이 우릴 넘어뜨린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보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이가 좀 아는, 더러는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거나 신학을 한 경우에 저의 완고함이 저로 그 허용의 범위를 넓게 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분명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곧 우리가 안다는 것은 스스로의 수고와 지식으로는 헛될 뿐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전 2:11, 13).”

 

말씀이 하나로 연결된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묵상을 하면서 자주 경험하게 되는 환희다. 오늘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시는 일과 솔로몬이 자신의 지혜로 부딪치게 되는 헛됨을 연관 짓게 된다. 결국은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듯이 우리 삶의 헛됨은 말씀으로밖에 인정할 수 없다. 사탄도 이에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10-11).”

 

늘 보면 사탄의 유혹은 미혹적이다. 그러나 보면 제 것이 아니다.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 하였으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8).” 사탄은 훔치는 자이고 훔친 것을 망가뜨리는 자이다. 우리 일상은 늘 같은 날 같이 연속이고 그 내용이 그 내용인 나날의 연속인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곤 하는데,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때론 우리 안에 의심이 가라앉았던 부유물을 휘저은 것처럼 삽시간에 시야를 가린다.

 

이때에 오늘의 일정은 모두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진행한다. 오늘 12절에 요한이 잡혔다. 요한은 헤롯 안디바의 간음 사건을 폭로하며 비판하다 투옥되었다. 엄밀히 말해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마치었다. 우리가 복 있는 자로 사는 일은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준수하고 이에 그 끝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세상을 보면 하나님 없이도 잘들 사는 것 같고, 그와 같이 무관하여 말씀이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은데 살짝 들추어보면 저마다의 필요는 주의 도우심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유난히 대형 정신과는 늘어가고 사람은 심적으로 강한 압박 속에서 긴장하며 산다. 괜찮은 척하나 저마다 안정제나 수면제를 달고 산다. 선진국일수록,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그 심화되는 영적전쟁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시편은 일갈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고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29:1-2).

 

이를 오늘 베드로와 안드레를 통해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하실 때,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8-20).” 어떻게 그렇게 빠른 결단으로 주를 따를 수 있었을까?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1-22).” 이와 같은 일이 주의 권능의 날에 있는 것으로 누구도 알 수 없는, 세상은 더욱 인정할 수 없는. 그러나 주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주어지는 힘과 평강의 복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