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 2:10-11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4-14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헤롯왕은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사람 안티파터(Antipater)의 아들이다. 주전 73년경에 태어났다. 저는 이스라엘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자 놀라서 수많은 또래의 아기들을 죽였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실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무관심하여 기뻐하지 않았다. 또한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알고, 구도자의 정신으로 별을 따라 와서 그리스도께 나아와 예물을 바치고 경배했다.
모두가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표정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했다. 우리 신앙의 문제는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에서 주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가 아니면 주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또한 자신들의 입장이 우선할 때 이런저런 이유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거나 뒤로 물러선다. 이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하시고, 성경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9).”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가 주께 복종할 때 우리 앞을 가로막는 사탄은 물러선다. 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8).” 이와 같은 말씀을 오늘 본문으로 이어서 보면 그 의미는 뚜렷해진다. 저마다 예수를 맞이하는데 그 입장과 모양이 다른 것에 주목하고, 주께로 가까이 할 수 있는 참된 마음을 생각해본다. 구원은 말씀을 듣는 자의 것이 아니라 영접하는 자의 것이었다. 곧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특히 헤롯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태도는 놀랍다. 먼저는 소동하였고,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3).” 다음은 어리둥절하여 무관심 속에서 지식을 따랐는데,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4-6).” 이를 보면 헤롯은 헤롯대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저들대로 마치 이를 어찌 수습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여긴다. 결국은 자신들의 입지 때문이겠다. 이 땅의 것을 포기하지 않을 때 온전히 주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어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라고 기대했던 교회가 나의 입장이나 처지를 생각한 것은 아닐까? 주께 바라는 것이 온통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듯 교회를 꿈꾸고 있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곧 주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심지어 교회까지도 나는 너무 낭만적으로 바랐던 것은 아닌지…. 그러다 형편과 사정에 맞지 않자 마음은 까부라져 시무룩해진 것은 아닐까?
예수께서 오신 이유 가운데, 오늘 6절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는 미가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삼상 16:1).”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이나 그곳에서 다윗이 태어났고, 저의 계보를 따라 예수께서 나셨다. 오늘 나의 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시무룩해하다 나의 약함에서 주의 강하심이 나올 것을 믿는다. 분명 예수님도 이르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스스로 나는 아니다, 괜찮다 할 때는 모른다. 더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전도서의 표현처럼 헛되고 헛되다 하는 비통한 고백이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것일 때 비로소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이를 위해 나로 하여금 ‘가난한 자’로, ‘포로 된 자’로, ‘눈 먼 자’로 ‘눌린 자’로 부르시고 자유롭게 하시려고 한다. 이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다.
오늘 나의 마음이 갈등하고 속상해하고 번민하는 것에 대하여, 그렇듯이 심령이 상하고 힘겨워하는 이를 돌아보아 주께로 인도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은혜만을 간구하게 하시는 것이다. 즉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이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만난 것은 참으로 큰 은혜이고 축복이다.
오늘 10절에서 동방박사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 2:10).” 저들은 이교도들로 어둠 속에 있던 자들로 비로소 참 빛을 보는 기쁨이었겠다. 우리로 어둠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즉 나의 죄가 중하여 이를 속량하심 받은 것과 기쁨은 비례한다. 은혜가 큰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그만큼 참혹해서이다.
고로 예수님은 내게 기쁨을 더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곧 나의 기쁨이 아니라 예수의 기쁨이 내 안에 있을 때,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하시는 이 말씀의 본질이 살아난다.
결국 믿음이란 오늘 이 땅에서의 어떤 형편이나 사정이 개선되는 것에 주목하는 게 아니다. 설령 더 어려워지고 힘에 겨워할 때도 그것으로 주가 주시고자 하는 주의 기쁨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은혜’는 가능하였다. 나는 누구보다 연약하고 변덕스러워서 어제는 종일 시무룩하였다가 이처럼 말씀 앞에서 주가 더하시는 기쁨을 사모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아, 나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으로 보다 더 의연하고 정직할 수 있기를.
할 때에 나는 무엇을 주 앞에 드릴 수 있을까?
오늘 11절에서 저들이 열어 드리는 것들을 읽다 생각하였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최소한 저들은 동방에서부터 이를 가지고 와서 드렸을 것 아니겠나? 나는 주께 드리고자 무엇을 준비하고 이를 가지고 가고 있는 것일까? 어처구니없는 소리지만 나는 가끔 송구하고 염치가 없어서 나의 부친께 나의 수명이라도 얼마쯤 덜어드렸으면 하고 생각한다. 늘 주의 일을 사모하고 부르시는 곳이면 지금도 어디든 달려가려 하는데, 연세가 이미 고령이라 여의치가 않다. 그에 비해 나는 부친이 내 나이 때 역동적이었던 사역을 생각하며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누가 일곱 명에게 자신의 장기를 모두 기증하고 갔다는 기사를 읽다, 나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까지 하고 혹시 나중에 쓸모없을까 하여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체라 유치하고 우습다는 것을 안다. 그만큼 나는 주께 드릴 것도 하는 일도 없어 그것이 송구스러워서 말이다. 늘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워서 가족들에게마저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 염치가 없으면서도 그런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면 또 미운 마음이 든다. 그러니 나의 이 인중적인 마음까지도 드릴 게 못돼 나야말로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 주심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새찬송가 494장 3절).
이 부분을 부를 때면 눈물이 글썽하면서, 사랑하는 아버지. 드릴 게 없어 염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씻어주길 바란다니, 아버지. 저는 항상 받기만 하고 바칠 게 없습니다. 하고 눈물짓는다. 다음 말씀으로 마디글로 되새겨본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6-8).
오늘 말씀에서 헤롯과 대제사장 등을 바라하며 나의 자세를 생각한다. 또한 동방박사들이 드리고 가지고 온 것을 보며 나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 눈물만 글썽인다. 송구스러워하는 나의 마음을 아시는지, 시편은 어김없이 나를 어루만지신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나를 두렵게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시는 말씀이 과분하여 고개를 들 수 없다. 하여 나는 다만,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부디 그러하기를. 나의 남은 생이 주를 바라며 주의 성전에서 사모함으로 드려지기를. 그러할 수 있다면,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65:4, 84:2).
이에 나는 주를 바라고 그의 얼굴을 찾을 뿐이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27:8-9).
그렇듯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4,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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