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전봉석 2023. 11. 5. 05:0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 26:8-9

 

 

 

나이든 장모는 가끔씩 앨범을 들고 나온다. 어제도 아들 내외가 어학연수를 가는데, 두 손자가 와서 같이 인사를 할 때 앨범을 들추었다.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내밀면서 이걸 좀 보라고 하자, 그때에 그가 누구인지, 서로들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지난 시간 속의 인물과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화가 한 곳으로 모아졌다. 그러다 잠시 시선을 놓치면 또 각자 현재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마태복음 1장을 읽을 때면 마치 그와 같다. 현재의 이야기에 정신 팔려 있던 것을 한데 모아서 ‘여기 좀 봐!’ 하고 우리의 시선과 관심과 대화를 한데 모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각자의 계통을 떠올린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치 그와 같아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5-46).” 곧 우리의 처음과 나중을 한 눈에 보여준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해 기록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행동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누가는 이방인의 관점에서 이방인을 위해 기록했다. 그러자 예수님을 인자와 구세주로, 인류의 친구로 서술했다. 그래서 구원의 보편성은 누가복음의 주제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이요,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진술한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상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예언의 성취자, 또한 교사로 제시한다.

 

먼저 오늘의 계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복음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기술한다. 예수께서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으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힌다. 다윗의 왕권은 B. C.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 되면서 이후 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었다. 이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와 정통성을 상기시킨다. 절망 속에 있는 유대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소개하는 것이다.

 

예수는 언약의 후손이심을,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창 12:1-3, 17:7)을, 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알게 한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8).” 이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하고 정리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시 89:29).

 

하여 그의 자손 중 하나를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 그 계승한 왕에 의해 영원토록 그의 나라가 보전될 것을 알게 하심이 메시아 언약이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13).”

 

오늘 본문은 ‘한 아기’ 즉 인간으로 오신 기이한 칭호,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고 예언한 말씀을 응한 것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이는 곧 다윗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면(창 12:2, 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이다(삼하 7:12-16). 저는 유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다.

 

마태는 그러한 조상의 혈통을 이어 예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통치자로, 진정한 왕으로, 메시아로 오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0-3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으로 불리는 것 같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알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속 사역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마치 늙으신 나의 장모는 앨범을 꺼내와 아들과 손자들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새삼 알게 하는 것과 같다. 예수는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 명칭(그리스도)으로 결합된 우리의 구세주이다. 하여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 하고 오늘 말씀을 연다.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그의 사역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한다.

 

‘예수’란 이름은 인류 구속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로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거의 언제나 ‘메시아’란 말과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어 사용되고 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이로써 구약의 ‘메시아’란 말이 어떤 특별한 직무를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뜻한다. 곧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과 선지자(왕상 19:16, 사 61:1)로 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된 것이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105:15).

 

‘메시아’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로 약속된 종말의 통치자로 소개된다. 마태는 특별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아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그래서 마태는 오늘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즉 예수가 구약의 예언에 따른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전체에서는 18번 ‘그리스도’란 명칭을 붙였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신 ‘그분’이며, 실제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 저는 어제나 오늘이나 실존하시는 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라 할 때 그 존재와 사역을 같이 놓고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탄생’이란 단어다. 18절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1절에 제시된 표제어보다 다른, 더욱 포괄적 의미로 다가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또한 낳고, 낳고 하며 이어지는 낳고(겐나오)는 ‘~의 조상이다’ 하는 의미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2).” 이어 주목하게 되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3).”에서 다말은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으로 유다의 아들 엘의 아내였다. 남편이 죽자 그의 시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아들을 낳고 계보에 오른다. 유대인의 족보는 여자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누가는 이 규칙을 따라 여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는 4명의 여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들 중 최소한 두 여인, 라합과 룻은 혈통적으로도 이방인이다. 밧세바와 다말이 이방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밧세바와 다말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한술 더 떠서 라합은 기생이었다. 마태는 왜 ‘멸시받는 여인들’을 예수의 족보에 넣었을까? 하나님의 구속사는 각양의 사람들이 포함된다. 믿음의 영웅도 있고, 모두가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도 있으나 반면에 악한 사람도 있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속사는 우리의 약함과 악함에 제한받지 않는다. 우리의 실패까지도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시는데 전혀 문제될 게 없으시다.

 

이러한 사실로 비추어볼 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하는 바울의 진술은 함축적이다. 오직 예수만이 참된 복의 근원이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이에,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72:17).

 

새삼 우리 구주 예수님의 계보를 살펴보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오늘 이 계보에서 나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믿음과 소망이 성경의 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말 같이 서러운, 또는 라합이나 룻과 같이 이방인으로, 혹은 밧세바와 같이 억울한 자로 주의 계통에서 복음을 잇는 개체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그와 같은 증거가 말씀 안에 있다. 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시다. 곧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곧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삶은 어렵고 인생은 언제나 고달프다. 친구와의 통화에서 그간 있었던 일과 여전히 이어지는 단내 나는 현실을 두고 뭐라 위로를 건네야 할지 마음이 어려웠다.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하나? 남들처럼 그저 사는 게 전부라면 적당히 편안하게 얼마든지 그러한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는 기관을 위해 거반 세월을 쏟아 붓고 있는 오늘이 여전한 것 같아 답답하다. 좀체 나아질 것 같지 않은 현실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왜 그래야 할까? 부르심의 사명은 그와 같아서 우리의 안락한 삶을 뒤로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를 가슴에 품고 누군 기독교 대안학교를 끌어안고 산다. 누구는 교회를, 누구는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투신한다. 개척교회가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잠식하고, 사람들은 더 나은 혜택을 추구하며 신앙을 향유하려 하는 이때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시는 말씀에 붙들려서 사는 것이다. 친구와의 통화에서도 그저 제 식구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런 고생을 사서할 게 무엇이겠나? 교회를 지키고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일도 그와 같아서, ‘목사가 아니면’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시달린다. 주가 우리 안에 두신 사명이 아니면 이처럼 괜한 일에 휘말릴 거 없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구원자로의 사명으로 자신을 투신하신 것과 같이,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우리는 안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6:1).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