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전봉석 2023. 11. 20. 04:50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5-16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2

 

 

주를 바라는 데 있어 어떤 표적이 믿음을 주는 게 아니라 믿음이 표적을 보게 한다. 우리 안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늘 무얼 바라고 그와 같은 바람으로 믿음을 대신하려 한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이란 게 스스로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어서 믿는다 하면서 믿지 않는 자보다 못한 것을 바라며 사는 경우도 흔하다. 가령 지옥에 떨어져서야 부자는 후회와 탄식으로 믿게 되었다. 그런 뒤 세상에 남은 가족들을 위해 구하였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 어쩌면 저는 죽었다 살아온 나사로를 표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

 

곧 이미 우리 곁에 표적은 있다. 이를 알지 못한 채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표적을 구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 16:1).” 그럴 수는 있겠다. 모든 표적의 표적이신 예수를 보면서도 그리 요구하는 것일 테니,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요 12:37-38).”

 

마치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떤 표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과 같다. 어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모처럼 온 형제들과 그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언제부턴가 내가 명절에도 오고가지 못하니까, 집들이 겸 이사한 곳까지 와서 한 상에 둘러앉았다. 못 보던 사이 조카들은 부쩍 자라 있었고 형제들은 각자 맡은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예배를 드리는데 아버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 많은 자녀들이 주를 따르며 그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으니… 주와 함께 사는 삶이 표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우리에게 표적은 우리 자신이 그 증거이다. 우리로 보고 들은 바를 삶으로 주께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이 귀하였다. 모두들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고 모인 터라 다 저녁이 돼서야 한데 모여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잠시 근황을 나누다 돌아가기 바빴으나 우리는 알고 있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 4:9-12).” 이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지고 우린 저마다 주의 길을 간다. 막내는 새로운 목회지를 선택해야 했고, 둘째는 곧 있을 재판으로 마음이 무거운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으나 그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본문으로 시편 127편과 128편을 이어서 설교하셨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 127:1-2).

 

다소 우리 삶은 고단하고 피로하나,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3-5).

 

이어 우리에게 소망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1-2).

 

주신 바,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충실할 때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3).

 

이는 표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4-6).

 

두 편의 서로 다른 관점의 시에서 우리는 주를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수만 가지의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곧 우리 안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끊임없이 가시적이고 표면적인 증거를 구하지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각자 저마다의 어려움과 또는 당면한 현실은 달라도 모두가 주를 바람은 주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형제들이 오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아파트 주변을 둘러보고 어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평소보다 수다스러운 나를 두고 아내가 놀라워하는데 나 또한 아버지 앞에서 스스럼없이 지난날을 돌아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신기하였다. 그야말로 전투적인 목회를 하며 사셨다. 인천으로 개척을 왔을 때도 간석동에서 주안으로, 주안에서도 서너 번 옮겨 연수동에 교회 건물을 짓기까지… 그 모든 일이 까마득하여 아련하기도 했다. 처음 인천으로 온 게 중3 때인가 했으니까 나 또한 대부분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 이야기에 저의 처가 된 이나 그때 서로 교회가 연합하여 수련회를 했던 이야기 등등. 나도 내가 그처럼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결국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 하는 말씀과 같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땅에 나고 죽는 일 외의 모든 과정이 실은 주가 우리에게 맡기신 순간들이었다. 매순간 너는 어느 쪽인가? 하는 묻는 데 따른 답이 그 다음 행보를 가게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그런 점을 뒤로 하고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들었던 소문을 말한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자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의 의도는 이것이다(13-15).

 

그러자 베드로가 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놀라운 대답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고 이르신 후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고 우리가 아는 것의 출처를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 더는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벗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 결국 우리가 어쩔 수 없던 죄의 결과로부터는 자유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태어나고, 죽고 하는 범주의 절대적인 범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이다.

 

그러나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은 주의 뜻으로 말미암은 가운데 저마다의 선택에 달렸으니,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갑자기 베드로를 향한 책망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분명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다. 이 말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고 절규하는 베드로의 심정을 이해한다(21-22).

 

우린 늘 나름의 기준으로 나름의 선택을 한다. 그런데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결국 자신의 판단, 생각, 의지에 따른 모든 것을 주께 올려드리지 못할 때 설령 그것이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그게 다 헛될 뿐이어서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즉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아니면 우리의 선택이 나라를 구하고 온 인류를 평화롭게 한다한들 ‘아무 유익이 없다.’

 

하고, 뜻밖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질기도 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살면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그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은 인지상정일 텐데…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곧 우리의 목숨이 이 땅의 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오늘의 유익이 무궁하지 않다(26).

 

어느 훗날 베드로는 증거하기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어쩌면 저는 그때 예수님께 들은 꾸지람으로 이와 같은 진리를 붙든 게 아닐까? 바울 역시도 사울의 때가 있었기에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오늘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나는 어제도 문득 이와 같은 은혜로 감사하였다.

 

삶이란 얼마나 짧고 허무한가. 그런데도 아등바등 살며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스스로 어떤 유익을 구하며 살던 때의 어리석었던 나 자신을 새삼 떠올리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눅 12:28).”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나는 이제 주를 바란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격하였다. 보청기를 빼먹고 와서 다소 어눌한 아버지의 귀에 가까이 대고 수다를 떨다, 내가 언제 이처럼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미주알고주알 수다스러웠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먹먹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가 주의 은혜로,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이에 나는 시편을 음미하며 찬송을 하고 나의 찬양은 기도가 된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41:4).

 

늘 되풀이 되는 오늘에서,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0-11).

 

세상 그 무엇도 우릴 이기지 못한다. 이는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