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전봉석 2023. 11. 18. 05: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 14:16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심정으로 그대로 있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어쩌자고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일까?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5).” 어쩌면 그만 쉬고 싶었던 것일까? 돌려보내듯 그만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6).”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이다. 어쩌면 나는 이대로 안주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나의 사정을 다 아시는 주님이 나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신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17).” 변명 같지만 사실이다. 그런데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18).” 그걸 가지고 대체 무얼 하시려는 것일까?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19-21).”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망설이다 마지못해 한 생각이고 말이었는데 결국 새로운 시작을 하게 생겼다. 아침에 나오면서 어떤 근심 같은, 괜한 후회가 밀려들기도 하였다. 우리 안에 주시는 어떤 생각이 또는 말 한 마디가 씨가 되어 싹을 틔운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라 몸을 사리고 있어도 불안한 판국에 괜한 시작을 벌이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씀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는데 우리 형편을 잘 아시면서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괜한 생각으로 마음만 어려운데,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 가만히 이 일이 어찌 흐르는가, 두고 볼 일이다. 주께 아뢰기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시 69:16).

 

온전히 주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이를 위해 주가 내게 더하시는 것은 말씀뿐이라,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19:50, 164-165).

 

말씀으로 말씀 앞에 앉히신다. 어느덧 이곳에 안주한지도 얼추 7년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곳이라 하나 아래층 작은 공간으로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더는 마다할 수 없었다. 주가 이르시길, ‘너희가 주라.’ 하실 때에 이는 주의 일에 참여하게 하심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그때에 나의 변명 같은 소리는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마 14:17).” 겨우, 고작…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네가 주라.’ 하시면 나는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이와 같은 반복이 나로 굴복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르시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내가 할 수 있는 한 일, 그 작은 일에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는 거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내게 이와 같은 일을 하게 하시는지, 근심이 먼저 따를 뿐이다. 이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문득 드는 생각이 어떤 결과를 염두에 두신 게 아니라, 나의 이 하찮은 참여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쩌면 나의 마음은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19:20).” 하고 그저 이대로 있기를 바라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가 주인이심도 알고, 저의 것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마음이었으나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하고 내미는 빈 손 같다. 어떤 오해가 또는 그릇된 두려움이 우리로 실천하기를 멈추게 한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1).”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서 나는 오히려 주인을 탓하고 있었는지도…….

 

누군 그의 가진 것 전부를 드린다. 보잘것없고 하찮을 뿐이지만 오히려 이를 보시고 주님은,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 21:2-3).” 렙돈은 작은 구리 동전으로, 하루 임금의 백분의 일 정도의 가치라고 한다. 그런데 주님은 어느 부자의 넉넉한 헌금보다 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더 크게 보시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하셨다. 과부라 하면 저의 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고, 저에게 두 렙돈은 가진 전부라 할 수 있다.

 

오백에 육십… 이래저래 부대비용을 더하면 우리 형편에 엄두가 나질 않는데 어찌 무모하게 움직이려하는지, 오늘 계약을 하기로 하고도 내내 마음은 저울질로 어려웠다. 나의 이런 모습까지도 주는 다 아실 텐데, 명색이 주의 일을 한다 하지만 온전히 주께 맡기지 못하는 마음이어서 더욱 더 송구할 따름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나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함이 아닐진대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고(창 18:14),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하고 말씀하신다(민 11:23).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일로,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눅 3:11).” 말씀하시는 것인데…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결국 오늘 나의 사는 이야기는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라, 행여 약속을 받았으나 증거를 얻지 못한다 해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1:13-14).” 곧 앞서가는 믿음의 선진들도 그러하여서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아직 가야 할 길은 목적지를 향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는 ‘네가 주라’ 하시는 데 주목하여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말씀으로 가름할 수 있다. 베드로는 멀찍이 서서 군불을 쬐며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이에 주님은 저의 트라우마로 남았을 상한 영혼을 치유하시려 불 앞에서 세 번씩이나 연거푸 묻고 대답하게 하셨다. 그러하듯 내 안의 불안이 또는 어떤 염려가 불신앙의 것은 아니라 해도 나의 약함을 주가 아심으로, 때론 느리게 혹은 정신없이 빠르게 일을 몰아가신다. 그리하여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주가 행하심을 안다. 나의 날들은 늘 그러하여서 우연처럼 또는 억지처럼 어쩌다 끌려온 것 같은데 그때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채우셨다. 솔직히 이번에도 나는 주춤거리는데 아내가 꽝꽝, 하고 언도를 내리듯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무섭게 일을 추진하였다. 늘 나는 생각만 많고 생각하기로 행동하기를 미루기 일쑤인데 아내는 한 번 그러자 하면 더는 생각하기를 멈추게 한다. 어쩔까? 하고 여전히 망설이고 있을 때, 됐어 그럼! 하고 가계약금을 입금하였다. 늘 내가 잘난 줄 알지만 실제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아내의 배포가 크다. 나는 말없이 어떤 두려움에 묶이는데, 아내는 불쑥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는 냅다 그리 맡기었다. 그리고 속전속결로 오늘 계약서를 쓰고 다음 주 중에 일을 진행한다. 할 거면 더 미룰 게 뭐 있어? 하고 아내는 나의 신중함으로 가장한 망설임에 쐬기를 박는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25:5).

 

이 모든 일에서 나는 종종 나를 답답해한다. 예전에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를 시작할 때도, 또한 군포에서 인천으로 옮겨올 때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은 아내의 저돌적인 추진력을 사용하셨다. 나는 이미 결정된 일을 두고도 미적거리기 일쑤인데, 아내는 그만하면 충분하였다 싶으면 앞뒤 잴 것 없이 하나님더러 책임지시라며 맡기고 내려놓는다. 늘 나의 소심함에 속 터져 하면서도 한동안 그러고 있는 나를 내버려두기도 하면서! 그리고 나는 주 앞에 나아가 엎드리게 한다. 마치 예수님처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나는 다만 기도할 뿐, 이와 같은 변화를 주저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아심으로, 어느 순간 발동이 걸려 밀어붙이는 아내 앞에서 놀라워하기도 한다.

 

어떤 변화에 따른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마 14:24).” 할 때에 오히려 그와 같은 일로 배는 더 빨리 힘 있게 항해하고, 우리 주님은 그와 같은 물 위로 걸어오신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주하게 하신다. 곧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3-4).” 희한하지? 어려웠고 어려운데 가만히 지나고 보면 그 기간 동안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즉 다들 살기 어렵다고 전전긍긍하는 이때에 우린 크게 이 일로 고통당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늘 그러했다. 하여,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39:1).

 

그런데 이상하지?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2-4).

 

나름 경건을 사모하고 말씀으로 산다 하였으나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안주하려 하고, 태만하여질 때 주는 강한 풍랑으로 우리를 몰아세우신다. 하여 새삼 깨닫고는 하는 일이,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5).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할 때, 내 안에서 터져나오는 놀라운 간구와 소망이 있었으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9).

 

오늘의 나로 이와 같은 고백으로 주 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미 앞서,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39:16).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이가 나로 무던히 주님만 바라게 하심인데,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9).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2).

 

이와 같은 고백을 주가 기뻐하시고, 주가 기뻐하실 때 비로소 나는 새 힘을 얻는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2, 4-5,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