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소원대로 되리라

전봉석 2023. 11. 19. 04:53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7-28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시 40:5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하는 오늘 시편의 찬송이 마음을 뜨겁게 한다. 흔히 우리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하기 일쑤다. 자신은 그럴 수 있고 남은 그것으로 정죄한다. 오늘 말씀 모두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의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 데 대해 힐문하고 있다.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 이를 가지고 남을 비판하는 데 대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이에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곧 어떤 일을 두고 서로가 왈가왈부할 때 은연중에 자신을 예외로 둔다. 즉 자신은 그럴 수 있고 남은 그럴 수 없다는 시선이다.

 

우리의 자유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제자들을 공격할 때 저들이 통상적으로 범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들어 반문하셨다. 유전(遺傳)은 율법을 삶에 적용하는 데 있어 그 범위를 규정하는 해설이다. 이때 율법과 유전을 동일하게 놓고 판단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서 저들의 공격을 방어하시는 것이다(3-8). 이에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그러므로 우린 우리 자신에게 속는 경우가 더 많다. 뭐라 화를 내고 누구를 비난할 때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제 자신이 들어야 할 말을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4).” 어떤 일에 있어 나도 다를 게 없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이 조금 지나고 부끄러움이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가령 어제도 아래층으로 옮겨 가는 곳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전날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집기들을 2백만 원에 넘기겠다고 하여 나는 거절하였다. 그리고 돌아앉아 투덜거리듯 어이없어 했다. 그런데 어제 다시 전화가 걸려와 컴퓨터와 전자기기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두고 갈 테니까 그냥 사용하라는 거였다. 그제야 마음이 가 닿는 곳이 잘 안 돼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저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이었다. 공연히 미안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물론 저는 내 속을 모르겠으나 나는 부끄러운 것이니, 사람 마음이란 게 얼마나 자기 편의로 받아들이고 공격적이 되는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주를 경외함으로 사람을 대할 때 너그럽고 온유하기를 위해 무던히 기도한다. 겉으로야 어떤지 몰라도 속으로는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오늘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종교적인 위선과 그 이면의 죄악을 목격하게 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듣고 깨달으라(마 15:10).” 그리고 이르시길,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1).” 하셨다. 나야말로 늘 이 말씀이 걸림이 된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입을 앙다물어도 속은 저 혼자 시끄러워서 볶일 때가 흔하다. 이때에 주님의 말씀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14).” 곧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8).”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9-20).” 그러니 사람 속을 누가 알까?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에서 두려움이 같이 든다. 이를 시인은 바로 인식하여,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6-17).

 

나로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을 돌아보아 스스로 자신을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것이 복이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 결국 주가 내게 바라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정의라 하면 늘 말씀에 비추어 나로 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김으로 사랑하고,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시편의 첫 머리가 복 있는 사람으로의 길을 제시한다. 이에 더욱 말씀으로 묵상하고 자신을 주께 아뢰는 일은 주의 뜻을 바로 알고자함이다. 두려운 것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자칫 우리의 유전이 또는 자신을 우선하는 판단과 기준이 스스로를 귀먹고 눈을 가리게 한다. 스스로는 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리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양보하게 된다. 그것은 먼저 교회인 것과 내가 목사인 것으로 행여 주께 욕이 될까 하여서이다. 부동산에 앉아 잠시 계약서를 쓰고 서로의 요구를 말하는 데 있어 중간에 어려워서 떠나려는 사람과 잘잘못을 따져 돈을 얼마라도 더 받아내려는 계산이 뒤엉겨 불편하였다. 각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좋은 이별은 묘연해진다.

 

서로 남은 그 기억 속의 사람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또 다른 인격을 형성한다는 데서 두려워할 일이다. 우리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에 따른다. 최인훈의 <문학과 이데올로기>에서 기억나는 내용이다. 오늘의 나는 숱하게 만나고 접하여 대처했던 사람들로 그 인격은 형성된다. 자주 남을 탓하는 자는 그만큼 자신에게 속고 산다. 누구를 욕하고 있을 때, 잠시만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객관화하면 그게 결국 자신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 한사코 부정하느라 더욱 강퍅해지는 것인데, 보면 늘 내가 욕하고 증오하던 사람의 인격으로 살아가고 있다. 흔히 자신은 부모처럼 안 살 거야! 하던 대로 살고 있는 것은 그래서다. 뭐라 옳은 말로 남을 비난하는 사람을 보면 저 또한 그런 사람이겠구나, 하고 짐작하게 된다.

 

이를 오늘 주님은 일부러 드러내어 한 여인의 인격을 죄와 구원의 문제로 가져오셨다.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여자가 외쳤다. 앞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어떤 점을 두고 가르치신 뒤이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하고 곁에 있는 제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셨다. 그리고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다소 의아하고 너무 야박하단 생각이 든다(22-24).

 

그런 뒤 이어지는 여자와의 대화에서 숨기신 예수의 의도를 비로소 알게 된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나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드는데,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아, 바로 이 장면, 저의 이와 같은 믿음을 직면하게 하려 하신 거였구나!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5-28).” 순간 ‘개’에서 ‘딸’로 신분의 변화가 현격하게 바뀌었다.

 

우리가 꼿꼿이 꼬장꼬장하게 굴 때는 모른다. 저의 말이 다 옳다. 원칙적으로, 하고 따지는 누구의 말에 괜히 앞에 앉은 내가 민망하였다. 그래서 시비를 걸고 싸움을 붙이려는 게 아니면 그런 시점으로는 서로의 견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얼결에 내가 손해 보는 쪽으로, 그래도 괜찮다는 듯이 저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게 하려 했다. 저도 다소 민망했던지 목사님이 다 양보하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니 어쩌자는 것인지… 우리의 온유함과 긍휼은 자신을 낮추어 그 영광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여자에게 무안을 주시며 원칙대로 대처하셨다. 앞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어찌 보면 저들을 대하실 때보다 더욱 엄격하시다. 한데 주님은 가나안 여자의 마음에서 끌어내고자 하는 고백이 있었다. 마치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123:1-2).

 

하여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스스로를 개 취급하는 데도 마음 상하기보다 이를 인정하면서 주를 높인다. 저는 알고 있던 것이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설령 죽이신다 해도 주는 선하시다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곧 우리로 사람에게 악착 같이 굴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의 문제로 간절해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22:1-2).

 

흔히 원칙을 운운하는 자는 남의 일에 냉소적이다. 자신의 손해는 1도 감수할 수 없는 위인이다. 그런 자가 돌아서면 누구보다 비굴하게 당장의 손해를 모면하려든다.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속성으로 산다. 셈이 바르고 정확한 사람은 자신이 조금 베푼 것은 부풀리고 남에 받은 것은 일거에 축소한다. 가나안 여자와 예수님의 대화는 한 편의 귀한 본보기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만일 여자가 자존심 상해 수치심을 안고 돌아갔다면 어땠을까?

 

많은 사람이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 앞에 왔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기도 한다. 누군 사람에게 위로를 받지 못해서, 누구는 목사의 권위적인 모습에서, 또 누구는… 그러나 저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자격지심과 원하던 것을 받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절박함이란 우리로 겸손하게 하는 스승이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40:1-2).

 

이와 같은 간증이 우리 삶에 늘어갈 때,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5).

 

이는 복 있는 자로 산다. 왜냐하면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에,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9).

 

주의 길을 가는 동안,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1,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