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전봉석 2023. 11. 21. 05:26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어느 때보다 믿음이 필요한 날이다. 동생의 4차 재판이 있는 날,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는 말씀에서 주를 바란다. 목사가 아니고, 믿는 자가 아니면 당할 일이 아니다. 설령 당하여도 몇 배로 앙갚음을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공공연히 다 아는 사실을 두고 교묘히 법을 이용하는 것이라, 나는 상대가 로펌을 끼고 대여섯 명의 변호인을 앞세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저는 이참에 손해배상으로 3억을 요구하네 어쩌네 하는데… 그러자고 벌이는 일치고는 아이의 장래나 자신의 강퍅함이 문제다.
 
우리가 주를 안다고 할 때 가장 우려할 일은 속단이다. ‘내가 아는 것’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누구는 그러다 교회를 떠나 하나님을 원망한다. 본인이 바라고 요구하던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에 따른 내용이다. 베드로가 알았던 예수와 그가 보았던 모습에 도취되어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 하고 바랐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9, 15-16).”
 
곧 우리의 현실은 황홀경의 세계가 아니다. 저잣거리와 같이 별의 별 인간들이 별의 별 꼴을 하며 산다. 그 가운데서 우린 그 현실의 벽에 번번이 부딪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예수 앞에 엎드릴 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9-20).” 우리는 스스로 크게 여기던 믿음을 주님은 고작 ‘겨자씨 한 알 만큼’으로도 충분하였다는 것을 일깨우신다.
 
곧 우리는 너무 지나치다. 믿는 자는 자신의 믿음이 지나치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고, 안 믿는 자는 믿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이 지나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에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스스로 어찌 하려는 모든 열심은 오히려 패망의 자리로 이끌 따름이다. 이에 지혜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곧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모든 결과에 승복하고 주를 인정함으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신앙으로 무던할 따름이다. 어제는 나의 생일이었고 나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나이에 놀라 거울 속의 나를 낯설어했다. 가만히 돌아보면 그때마다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셨다. 나이가 들면서 왜들 그렇게 흘러간 노래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노래와 함께 그 시절, 찬란하였던 저마다의 기억을 왜곡하고 그리워한다. 그땐 좋았지… 하고 추억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인생은 언제나 힘에 겨웠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때도 지금도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힘도 주신다. 주님은 약속하시길,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앞서 모든 성경은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 곧 우리의 믿음이란 당장의 어떤 결말을 놓고 씨름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속단할 때 우린 냉소적인 사람이 된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4, 8).”
 
우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때’를 예측하고 이를 바라다가 어그러지면 불신으로 돌아선다. 그럴 때 나의 지난 시간들은 오늘을 대처하는 능력이 된다. 그땐 내가 주를 멀리하고 거역하는 자리에서 살 때도 주가 함께 하셨음을 인정한다. 곧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그러기까지 주는 참고 또 기다리시며 나를 도우셨다. 이에 오늘도 주 앞에 엎드릴 때,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40:17, 70:5).
 
저들은 칼과 창으로 나오나 우린 다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울 것이다. 하여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사 2:12).” 우린 할 수 없지만 우리로 상대하게 하심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를 두고 동생을 위해 기도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 믿는 자들의 사명을 두고 기도한다. 같이 대거리로 싸울 수는 없다. 그랬을 때 교회가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없을까 하여 참고, 양보하고, 손해 보는 자리로 물러서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울 게 없으나 주의 십자가로 우린 참 아름답고 귀한 것을 알게 된다. 오늘 3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심은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눅 9:32).” 모세와 엘리야는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31).” 그 대화로 짐작할 수 있다. 곧 바울은 이를 알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를 우리로 붙들게 한다.
 
즉 이 땅의 것으로 전부라면 저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 그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게 없다. 당장의 승리와 그에 따른 기쁨이면 족한 것이다. 분풀이란 흔히 그런 것이어서 내가 못 먹을 밥상이면 재라도 뿌리는 것이다. 그런 이치 속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산다는 일은 더러 억울하고 분하고 되갚을 길 없는 손해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믿는 자로 산다면서 악착 같은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죽어라 하고 열심일 때 자신의 열심이 자신을 삼키기 십상이다. 보면 교회에서도 그렇게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던 사람이 돌연 원수 아닌 원수가 되는 일은 흔하다. 저는 억울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심사로 더는 주를 경외하지 못한다.
 
주를 경외함이란 ‘주가 나를 죽이실 것을 알면서도 주를 신뢰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부활은 앞서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으로의 단절이고 고통이다. 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곧 오늘 우리의 하루는 하루씩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하루씩 새롭게 살아나는 사람도 있다. 영생이란 그렇게 완성되어 주와 함께 누린다. 이에 우리는 세상 이치로 사는 것 같으나 그에 적용을 받지는 않는다.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하시고,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25-27).” 이는 세상에 순응하는 것 같지만 주도하는 일이다. 세상이 우릴 승복시킨 것 같지만 우리가 세상을 건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기도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5).”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산다는 일은 그러하였다.
 
주의 말씀 외에 우리가 승복할 것은 없다. 하여 기도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119:18-19).
 
결국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이에 우린 굳건하였다. 비록 가진 재물 없으나, 남들 가진 건강도 없으나, 이 땅에서의 성공도 실패도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12).” 우리로 승리하게 하신다. 이는 앞서 하나님의 아들로 승리하신 이의 승리다. 그러므로 우린 패할 수 없다. 세상은 우리를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8-40).”
 
믿음의 사람은 하나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이에 나는 일련의 사건과 상황을 두고 마음은 엇눌림을 당할 수 있으나 우리의 믿음은 꺾일 수 없는 것을 안다. 교회를 새로 옮기면서 어쩌면 나의 생에 이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도약으로 주 앞에 아뢴다. 이 땅의 모든 오늘은 마지막이라, 나는 그와 같은 심정으로 새벽을 깨운다. 그리고 이렇듯 말씀 앞에 앉힌다. 마치 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다고 하는 것 같이 허리가 아파서 끙, 하고 돌아앉으면서도 묵상 글을 쓴다. 운전을 할 때도, 누굴 만나 어떤 일을 결정할 때도, 늘 매순간은 마지막이라… 홀연히 주가 오실 때 나는 그때 무얼 붙들고 있는지를 놓고 상상한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사모하는 일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42:1-2).
 
언제든 주 앞에 설 준비로 하루를 산다는 일은 천국 백성으로 사는 기쁨이다. 그랬을 때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 바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쥐고 흔들 수 있으나,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3).
 
더러는 서러움에 또는 억울함에 눈물을 흘릴 때도 있지만 오늘은 말씀으로 내게 선포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곧,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8).
 
이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감히 내가 아는 짧은 지식으로 또는 같잖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속단하기보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9).
 
주께 아룀으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