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전봉석 2023. 11. 24. 04:15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1-15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 45:6

 

 

할 일이 많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 우리는 아직 멀었다 하고 말씀은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다 한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27-38).”

 

오늘은 그에 따른 예로, 그럼에도 길가에 노는 이들이 많았다. 이때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1).” 제삼시에,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하고 저들을 품꾼으로 불렀다(6). 예수께서 일전에 말씀하시길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하시며 천국은 차지하는 자의 몫으로 설명하신 바 있다. 그에 따른 내용으로 오늘 말씀은 이어진다.

 

일꾼이 일을 마친 후에 상황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8).”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자 제삼시에 온 자는 더 일찍 와서 더 많이 일하였으니 더 많이 받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자 저들이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11).” 곧 자신들이 생각했던 셈과 다른 것이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

 

어쩌면 나의 마음에도 이와 같은 원망이 항상 있는 것 같다. 돌아보면 더 어렸을 때도 나는 부친의 목회 현장에서 교회 청소부터 보조교사 일까지 충당되어 일했다. 조금 더 자라서는 성가대에 차량운행까지,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었어도 감당해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호의’를 권리로 아는 사람들이 싫었다. 언제가 앞전에 먼저 데려다주고 다시 가서 데려와야 하는 가정이 있었는데, 늦게 왔다며 뭐라 핀잔하던 게 기억난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내가 하던 봉사나 헌신을 ‘호의’로 생각하고 임했던 것이다. 이를 누가 알아주고 고마워하면 당연하게 여겼고 행여 뭐라 요구하는 바가 있을 경우 마치 베푸는 자의 위세를 떨듯 마음에 원망이 들끓었다.

 

상대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을 특수학교 보육원에 봉사 다니면서 느꼈다. 중3 때 처음 발길을 하기 시작하면서 꽤 오랫동안 주말마다 갔는데, 때 되면 많은 곳에서 기부금이나 물품을 전달하러 왔다. 그때는 나 역시 저들 또래라 아이들 틈에 있다 보면 저들은 늘 행사에 따른 기념사진을 남겼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들러리로 세워져 받은 물품 사이에서 강제웃음을 지어야 했다. 저들의 호의는 폭력적이었고 이에 반하면 가차 없이 발길을 끊기도 했다. 그러니 그때 원장이나 주관하는 단체에서는 아이들을 마치 비인격적인 존재로 취급하였고, 나도 몇 번 본의 아니게 저들 품에 섞여 서서 그런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혹은 선의를 베풀 때 이를 호의로 여기는 그 자체가 선하지 않다. 호의란 친절한 마음으로 좋게 여겨주는 것이다. 좋게 생각하여 준다는 그 자체가 우위와 열등을 조장한다. 나는 오늘 말씀에서 ‘제삼삼시에’ 와서 가장 일찍, 많이 일한 자의 마음에 집중하게 된다. 나름 열심을 다해 일하고 그에 따른 어떤 보상이나 대접이 부족할 때 우리는 서운하다. 교회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지만 이는 당장 피부로 느껴지는 게 아니어서 목사나 다른 성도가 이를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린 실망하기 일쑤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여기서도 주목하게 되는 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이다. 주의 일, 교회에 봉사할 때 이는 호의가 아니다. 친절도 아니다. 엄밀하게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수고하고도 부족한 게 많아 송구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진리의 말씀을 먼저 옳게 분별해야 한다.’ 곧 말씀에 따른 것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세워지고 임하여야 옳다. 흔히 우린 남에게 이를 적용하고 자신에게 이를 예외로 두는 경향이 있다. 결국은 누구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지에 따른 결과다. 과연 나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시는 말씀에 합당할까?

 

이번 주간은 어쩌다 서둘러 교회 이사를 하게 됐다. 그러느라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준비하는 일이 늦어졌다. 어제는 새벽 한 시에 나와 묵상 글을 작성하고, 오전 11시에 아내가 나올 때까지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허리가 아파서 복대를 하고 끙끙거렸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경험은 주가 또 ‘열어 보여주시는’ 경험이다. 외람되지만 말씀을 볼 때 몇 단계의 경험이 다르다. 처음에는 말씀을 본다. 이때는 문맥과 의미와 구성과 어휘를 살피느라 큰 감동은 없다. 다소 기계적으로 읽는다. 다음은 이를 원고로 작성하면서 한 문장에 꽂히기도(?) 하고, 어느 대목에서 다른 각도의 의미가 읽힌다. 그렇게 몇 번을 읽고, 다듬고 할 때마다 몇 번이고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 같다. 심지어는 다 완성하여 출력까지 하고, 정독을 할 때 다시 새롭다. 특히 주일 날 아침에 밑줄 긋고 더해지는 생각을 메모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열린다? 새롭다?

 

아무튼 어찌 표현하기 어려운 놀라움이 있다. 어제도 그와 같았다. 그리고 이를 우습다 해야 할지… 오후 다섯 시께 출력해온 설교원고를 보다 잠들었는데 오늘 새벽까지 죽은 듯이 잤다. 그리고 다시 이 아침,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우선 나의 할 일은 말씀을 묵상하고 주가 열어 보이시는 계시의 말씀에 집중하는 일이다. 이를 삶에 적용하며 개인적으로는 나의 찧고 빻고 하며 볶아대는 일상에서 버무려져 어떤 회의와 갈등을 거쳐 설교원고로 작성이 된다. 이를 설교로 전달하는 일은 다른 것이다. 그때는 성령이 나의 입술을 주도하신다는 것을 생생이 느낀다. 앞서 하려 했던 말을 버리게 하고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내어놓게도 한다. 이렇듯 나의 본업은 말씀 전하는 자이다. 또한 누굴 위해 기도하고 저의 일로 같이 씨름하는데 이 또한 그때마다 주가 맡기실 때의 일이다. 오늘 일련의 과정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주도하시려는지 모르겠다.

 

다만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다만 돈벌이로 글방을 하고 누구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다. 돈벌이는 그 일 자체로 사람을 침울하게 한다. 그래서 다른 차원으로는 돈벌이가 아닌 법벌이로 하는 일이다. 물론 이 또한 지겨운 일이나 돈벌이와 달리 숭고하다. 돈벌이는 돈에 끌려 다니는 것이라면 밥벌이는 주신 바 한 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일이다. 교회에 폐가 되지 않고 성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바울도 천막 짓는 일을 밥벌이로 하여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나아가 이 또한 사명으로 받는 것이다. 설마 천막 짓는 일이 주업이겠나? 마찬가지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나 심지어 직업 목사로 사례를 받는 일이 전부이겠나? 결코 그럴 리 없다. 오늘 ‘제삼시에’ 온 이의 원망은 그와 같은 원리를 벗어난 것이다. 주인이 뜻하고자 하는 일을 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돈벌이로 자신의 노동을 허비한 셈이다. 약속된 돈을 받으면서도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은 원망으로 저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다. 감사가 없이는 천국을 딛지 못한다. 믿음으로 마치 당연한 권리로 이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이미 상급을 받았다.

 

인생의 지난날은 ‘베틀의 복’ 같다.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욥 7:6).” 이것은 경주하는 것처럼 빠르다.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9:25).” 우리는 지나간 복으로 살지 못한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사는 게 아니다. 구원의 기쁨과 확신은 그때의 감사다. 오늘은 새로운 감사로 채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지나간 것이 지나간 것이라면 내일의 것은 내일에나 온다. 우린 항상 오늘에 있고, 지금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게 허사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어찌 됐든 선택된 자들이다. 이를 우연이니, 운이니 하는 의미로 접근하면 더는 다룰 말이 없다. 우리의 모든 희로애락과 생사화복은 전적인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다. 특히 날 때와 죽을 때는 일체 우리의 관여로 이룰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를 비틀어버리시듯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그런데 우린 흔히 ‘~해야’ 주가 사용하신다는 논리를 지겹도록 펼친다. 교회에서도 이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래야 성도의 열심을 독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는 가지만 분명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그러므로 우리가 주도하여 주체적으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모두 어불성설이다. ‘제삼시에’ 온 이가 ‘제십일시에’ 온 이를 두고 원망하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대적으로 자신은 저보다 낫고, 열심히 더 많이 일했다는 자기 판단이 일의 결정에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저는 온전한 감사를 이룰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32:6).

 

성경은 우리로 일체의 자기자랑을 경계한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그런 거 보면, 모든 게 날 향한 말씀이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하고 물으시면 나는 아니다. 아득바득 나는 못한다는 핑계로 도망만 치던 세월이었다. 그런데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예전엔 내가 벌어서 내가 수고한 것으로 돈벌이든지 밥벌이든지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아는 사람은 알지만 지겨움은 우리 영혼을 짓누른다. 그래서 여러 취미를 찾고, 같은 취향의 사람과 어울리며 회포를 풀며 살았다. 그러니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내가 거저 받지 않은 게 하나도 없는데 무엇이 또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구멍 난 감사는 감사하긴 한데 늘 부족하다. 만족함을 누릴 수 없다. 이는 일부러 그리 삼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왜 하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귀한 보배, 구원의 확신과 감사의 기쁨을 질그릇에 담은 것은 ‘그 능력’ 곧 구원과 감사 곧 이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결국 오늘 내가 또 하루를 주 앞에 나아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함이다. 내 의지나 투철한 사명을 운운하다간 질그릇의 특성상 금세 금이 가고 깨진다. 그렇게 교회를 떠나고 목회를 주저앉은 이들이 대체로 열심 있는 자들이었다는 사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 20:14).” 하시는 주의 말씀에서 강경하심이 느껴진다. 곧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5).” 그리고 이르시는 말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 나중 된 자의 특징은 감사뿐이다. 송구하고 면구스러워 모든 게 다 은혜뿐이다. 오늘도 무엇보다 은혜를 구하는 것은 은혜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나중 온 자들은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하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곧 우리의 간절함이 우리의 눈을 뜨게는 할 수 있으나 구원은 아니다. 구원은 곧 주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34).”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45:6).

 

이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이와 같이 우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잘한다 할 것도, 못했다 할 것도 없다. 오직 주만 바라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러할 때에,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