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전봉석 2023. 11. 26. 04:11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시 47:6-8

 

 

주일예배에 지장이 없게 하려고 정돈을 서둘렀다. 이전하는 날짜를 서둔 것은 아닌데 앞전에 있던 사람과 다른 누가 새로 들어오겠다는 사람 사이에 우리가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주일에 차질이 없게 하는 거였다. 나는 매일 새벽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일찍 잔다. 시계를 머리맡에 두고 자다 깨서도 시간을 확인한다. 어디를 갈 때 우리는 미리 준비한다. 시간에 늦지 않게 서둘고 가서 무엇을 어찌 할지를 대비한다. 하다못해 이 땅에서의 모든 일정도 이와 같은데…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 하시는 말씀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2).” 청함을 받은 자들이 어쩐 일일까?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5-6).” 청함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없었던가?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8, 10).” 그런 와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11-12).”

 

청함에 대한 기대도 그에 따른 준비도 전혀 없는 것을 본다. 이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 그에 따른 결론이 무겁게 다가온다. 청함을 거절할 수 있으나 결과는 거부할 수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이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우리 안에 주를 사모하고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는 마음은 은총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다. 마치 좋은 것을 두고 사랑하는 이에게 이를 알리고 권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이는 부르심에 따른 소명과 보내심에 따른 사명의 자연스러운 연관이다. 곧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이에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옮겨 이전을 하는 데 있어서도 주의 날을 우선하여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울러 주를 사랑함으로 주의 마음을 사모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겠다. 마치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의 표현처럼 같이 있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감정으로 주를 사랑함으로 주의 나라에서 영원하기를 사모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의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곧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기다리는 데 따른 인내와 소망이겠다. 그 사이 너무 좋은 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여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가령 무엇을 바라며 간절히 주의 도우심을 구할 때 이를 기다리는 동안 사탄은 더 빠르고 왠지 적당할 것 같은 일정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손에 쥘 수 있는 이 땅에서의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러니 오늘 청함을 받은 자들이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7-20).” 그럴 수 있다. 어쩌면 훨씬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내가 좋아하고 잘 따랐던 선생은 청년 때에 교회에 열심이었다. 영어성경공부 모임을 만들고 앞장서서 주의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저가 바라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가난은 여전하였으며 사는 일에 전전긍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갔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세상은 그때마다 성과가 있고 보람이 있는 듯하였다. 고등학교 선생에서 언론사 기자로, 기자에서 한국문화 콘텐츠 사업의 CEO로 저의 발전은 나로 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나름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로 흡수되어 다원주의자가 되었다. 모든 만사에 다 하나님이 깃들었고, 모든 신은 다 하나로 인간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선생은 뒤늦은 나의 신학과 목회를 가장 안타까워하며 말렸다.

 

그렇게 데마는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갔다. 새로 벌린 다섯 겨리의 소를 길들여야 하고, 장가들고 시집가야 한다.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전념해야 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수고해야 한다. 저들의 거절은 이성적으로 타당하다. 속된 말로 팔자 좋게 기도하고 말씀 보며 천국을 운운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누려야 할 즐거움도 많다. 결국 육신의 소욕은 영혼을 돌보는 일을 뒤로 미룬다. 그러나 저들의 내일과 우리의 내일이 다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이해는 간다. 이와 같은 말씀이 선뜻 와 닿을 리 없다. 그런 가운데 내 안에 두시는 어떤 마음이 신기하다. 아파도 나는 주일 지나고 아프기를 바란다. 어쩌다 서둘러 교회처소를 옮기면서 우리의 제일 목적은 주일예배에 차질이 없게 하는 거였다. 어제그제 아내가 오전에 와서 일사천리로 정리정돈을 하며, 쓸모없는 것은 비우고 버리게 하였다. ‘당근’을 나는 잘 못한다. 응답하고 기다리는 일에 번거로움을 못 견딘다. 아내는 얼마씩 싸게 올렸다가 흥정이 늦어지자 빠르게 나눔으로 전환하여 이틀 만에 모두 치웠다. 그런 걸 보면서 그 작은 일에도 기다림이 있고 상대의 확답을 토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성미 급한 사람은 못하겠다 싶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우선하며, 이 시간을 귀히 여기는 일에는 그만큼의 수고와 인내가 따른다. 이때의 수고와 인내가 단지 고달프고 어려운 게 아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를 믿고 맡김으로 가능하였다. 그러려니 마음은 조급하고 세상을 보면 다들 저마다의 시간을 잘도 활용하며 사는 것 같아서… 선생이 나를 꽤 오랫동안 그것도 집요하게 만류시켰던 것은 ‘자신도 해봐서 안다’는 경험 때문이었다. 실제 나와 같이 목사 아들로 꽤 오래 곁길로 가다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를 하다 스스로 세상과 담 쌓고 암자(?)로 들어간 이가 있다. 저는 나의 결정에 앞서 만나고 싶어 했었다.

 

돌아보면 만류하고 돌이켜 이 길을 가지 못하게 하려던 사람들이 꽤 된다. 또한 여의치 않은 현실과 어려움이 그러했고, 심지어는 정신적인 공황상태로까지 나를 몰아놓으며, ‘이래도 할래?’ 하는… 밭을 사고, 소 다섯 겨리를 벼려야 하고, 장가들고 시집가야 하는 그 현실이 이해가 된다. 다시 생각해도 그런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오늘까지 온 것은 기적이다. 주의 은총이 아니면 못했다. 울면서 신대원을 다녔으니까! 학기 중에도 언제든지 그만 둘 생각만 하고 핑계를 찾았으니까!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그만 둘 이유가 수만 가지는 되는데 그래서 멈추면 더는 갈 길이 없었다. 나의 절벽 같았던 상황이 주의 은혜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목사 고시를 두 번 떨어지고 면접관이 그래도 또 하실 겁니까?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솔직히, 아니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하는 대답은 사실이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에 크게 공감하여 동기나 후배들을 권면한다. 돌아서거나 잠시 멈추면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대로 누구는 목회를 접었고, 누구는 아직도 다음에 하겠다고 큰 소리 친다. 나는 나의 절박하였던 시간을 사랑하고 감사한다. 그땐 죽을 것 같았는데 죽기 살기로 주께 맡겼더니 주가 이루시었다.

 

나는 두려워할 줄 안다.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죽임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사 65:12).” 이제 나와 같은 길을 가던 아무개에게 이와 같은 경고를 들려줘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되레 오늘의 나를 측은히 여긴다. 선교니 목회니 하던 친구는 사역을 접고 간간히 주일만 지키는 사업가가 되었다. 저도 점점 선생과 같이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그 위에 내 그물을 치며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끌고 바벨론으로 가서 나를 반역한 그 반역을 거기에서 심판할지며 그 모든 군대에서 도망한 자들은 다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니 나 여호와가 이것을 말한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17:19-21).”

 

하여 이와 같은 말씀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랑을 잃을까, 식을까 하여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일과 같다. 사랑할수록 더욱 사랑을 갈망하는 것과 같다. 정체된 사랑은 없다. 하물며 퇴보는 말도 안 된다. 곧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그러므로 이 생명은 영생의 것으로 이 땅의 것으로 일희일비하여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곧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 나는 새삼 하나님이 주도하심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그럴 수 있게 우리의 힘듦은 적당하였고, 모든 일은 마치 서로 약속이나 된 일 같았다. 주가 행하심은 남음도 모자람도 없다. 그러므로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47:1-2).

 

시편은 늘 결론이면서 새로운 도입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반드시 시편으로 마무리하는 까닭은, 어떠하든지 모든 상황에서 우리로 찬송하고 감사하게 하심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하여,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6-7).

 

그리하여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