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 21:22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0
내가 나의 나 된 것으로 기뻐하기보다 우려와 염려가 앞설 때가 더 많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데도 그게 그렇지가 못하다. 남의 일이면 누구라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것인데 내 앞에 닥친 일에서 나는 번번이 넘어진다. 넘어지고 후회한다. 어떤 일을 두고 마음이 좀 더 너그러웠으면 좋겠다. 오늘 말씀에서 나의 이와 같은 푸념이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한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일명 고난주간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의 시간이다. 저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여기까지 말씀에 응하시고자 한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4-5).” ‘이는 겸손하심’을 나타낸다. 모든 일은 하나님 안에서 의도적이다. 우연은 없다. 오늘 이 모든 일 또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이를 우린 우리의 이해나 지식으로는 감당하지 못하나,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9).”
이와 같이 말씀으로 알고 앎으로 나의 일상을 돌아보는 데 있어 기준을 삼는다. 곧 오늘 본문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바로 그 ‘때’를 우린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조바심이 일고 조바심으로 화를 낸다. 그러나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이 모든 게 주의 계획하심에 따른 일로,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결론은 찬송이다. 찬송은 감사다. 감사는 감사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우러나는 마음이 진정하다.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어찌 저는 그럴 수 있었을까? 희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아뢰는 일, 기도, 감사, 찬송으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까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15:3).
하여,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그러므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결국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나의 마음에 여러 생각이 현실에 부딪쳐 짜증이 올라오고 조바심으로 몸부림치게 할 때, 말씀은 그 말씀이 이루심을 통하여 나로 나를 이겨낼 수 있게 한다. 즉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7-8).” 곧 이 모든 것은 지나간다. 슬픔도 기쁨도 오늘 우리 곁의 것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알면서도 욱, 하고 올라올 때의 감정이란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쥐고 흔든다. 사실은 이 아침 마음이 좋지 않다. 부끄럽기도 하고 송구하기도 하다. 구십을 바라보고 있는 장모와 함께 저녁마다 예배를 드린다. 노인들의 특징이기도 하겠고, 약간의 경도치매가 있어 그러려니 하지만… 자꾸 했던 말을 또 한다. 뜬금없이 어떤 물건을 찾는가 하면 뭐라 요구하는 말이 늘 똑같은 소리다. 특히 예배를 드릴 때 어느 구절에 대해 설명하다보면 난데없이 어떤 기억이 교차하는 모양이다. 당신도 말을 거들며 그에 따른 나름의 설명을 하려 한다. 그럼 나는 어느 지점에서 말을 중단시키고, 그게 아니고요… 하고 다시 본문의 의도를 설명하려 애쓴다. 어제도 그러려니 하고 들어드리고 말이 끝날 때쯤 본문의 의도를 다시 설명했어야 하는데 순간 짜증이 났다. 우습지만 예배 중에, 그것도 말씀을 전하다 이와 같은 마음이 든다는 게 한심하다.
그러다 그만 중간에 말을 끊고 더 말하지 못하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만 했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장모는 하다못한 말을 이어보려 하였고, 나는 내 할 말만 하고, 아내는 중간에서 무안한지 어머니 손을 슬그머니 잡았고… 서둘러 예배를 마치고 일어서려니까,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워낙에 성격이 온화하고 총기가 있어 말씀드리면 알 것도 같은데, 이게 또 희한한 게 본인은 할 말만 하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노인의 특성이면서 치매가 진행되는 것인가 하는 우려와 함께, 그렇다고 예배를 인도하면서 짜증스러운 마음이라니! 예배 마치고 자리에 눕자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초라한 것이다. 주 앞에 송구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민망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어떤 염려가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동네 사람들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한 노인을 건사하는데 온 가족의 마음이 이해하고 또 인내하는 마음으로 단련되어야 할 것 같다. 아내는 거의 로이노제에 걸릴 수준이다. 뜬금없이 어느 물건을 찾거나 무얼 맡겼던 것을 가져오라 할 때 아내는 난감하다. 식사 후 먹다 남긴 생선쪼가리나 김치 부스러기도 버리지 못하게 하고, 다음 끼니 때 그걸 찾는다. 그걸 아내가 버렸다고 하면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지고 나는 중간에 앉아 수저를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기다리다 괜히 아내를 뭐라 하고 장모를 거들며 식사를 독려한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일이란 마치 한 우주가 생겨나고 지난 우주가 사라지는 일과 같아서… 지난 주일에 부모님이 오셔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한 후 엄마와 앉아 이런저런 말을 하는데 늘 같은 내용으로 어떤 이야기는 무한 반복되는 것을 느낀다. 들었던 이야기라고 말을 막을 수도 없고… 그런데 어제는 아내가 내게도 자꾸 했던 말을 또 한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했어? 하고 물었더니 열 번은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 말하는 것 같은데… 것도 몇 번을 했다고 하니 사실인가 싶어서 의아하기도 하다… 저녁예배 때 그런 사달이 난 것이었니, 자려고 누우니까 여러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를 어찌 받아들이고 또한 나 자신은 경계해야 하는 것인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일, 곧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4).” 주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서로를 돌보는 일로,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막 4:24).”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일은 <벤자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는 것 같이 어린아이가 되어 자기 말만 하려 드는 고약한 습성으로 뒤집어지는 일인 것 같다.
여기서 문득, 그렇다면 나는 무얼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까? 하는 생각인데…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하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이를 나는 어찌 받아서 해결해야 할까? 어제는 누워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먼저는 내버려두자. 그것이 진리에서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맡겨두자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내는 교회를 정리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책으로 골머리를 썩다가 비우자, 쓸모없는 것은 다 버리자고 하였다. 유난히 책을 버리지 못하는 나로서는 마음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실은 늘 그럴 필요를 느끼고는 있다. 대학 때 교재는 물론 그 전에 고등학교 때나 읽었을 것도 여전히 갖고 있으니… 나는 색이 바라고 먼지 같은 곰팡이 같은 책 냄새가 정겨운데.
또한 장모를 위시하여 앞으로 부모님도 그렇고 나 자신도 곧 그럴 테지만 그러시려니 하고 들어주는 일도 귀한 사역의 하나이지 싶다. 하긴 성도와의 대화에서도 한동안 저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다 멀미가 날 정도이다. 껍질을 벗기듯 그렇게 다 쏟아내야 그 두터운 자기 방어에 감추어져 있던 속살 같은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 바울은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즉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이를 위하여 오늘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 그때에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8-9).”
머잖아 저들 대다수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칠 것이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내버려두시고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신다.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12-13).”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으나 주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게 둘 수는 없다.
또한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14).”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16).” 주의 생각에는 온통 말씀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하실 뿐이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22).” 하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신다(23). 결국은 고백이나 대답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가 참 아들이다.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30).” 곧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
당대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이와 같은 말씀 선포는 엄히 경고하신 바이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2).” 저들은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는 위인들이었다(33-41). 우리가 온전히 주를 섬긴다는 일은 생각으로나 말로 하는 게 아니었다. 마음이 아니라 손으로 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곧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도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42, 44).” 이 말에 발끈하여 죽이려 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곧 우리 안의 아집과 교만이 우리로 짜증을 내게 하거나 화를 돋운다. 그때에 우린 어쩌면 좋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6:1-3).
주를 의지한다는 일은 나로 쳐 복종시킴으로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앉혀야 한다. 행동하기란 어쨌든 생각하기를 통해 마음을 거쳐 몸으로 행하여지는 일일 테니, 더러는 너무 더디다 해도 들어야 한다. 마음이 동요돼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기어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오늘도 그저 말씀 따로 행동 따로 일 때,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 같다(46). 이에,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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