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마 23:2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14
선생이 되어 산다는 일은 두렵다. 하찮은 문제로는 엄격하면서 정작 영혼의 문제에는 관대할 때가 있다. 그것이 나 혼자의 일이어도 두려울 텐데 하물며 남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어서 부모나 교사나 어른으로 산다는 일은 그리하여 조심스럽다.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오늘 주님은 이에 ‘화있을진저’ 경고하신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8).” 또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9).” 물론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10).” 그러므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11).”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2).”
이와 같은 원리를 예수님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일주일 상간에 전하시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모세의 자리’에 앉는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2).” 스스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결정하려 들 때가 많다. 그런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곧 우린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어쩌면 우리를 파괴는 것은 ‘지적질’이다. 부모로서 혹은 선생으로서 나는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그러고 살았는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저녁 식탁에서 종종 지나간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아빠 그때 기억나? 하고 아이들이 말을 꺼낼 때면 나는 늘 웃으면서도 부끄럽다. 너무 겁 없이 부모가 되었고 함부로 아이들 위에 굴림하고 살았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면서 본이 되기는커녕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으로 살았다. 나는 늘 이를 인정할 때면 그럼에도 아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간직하고 사는 것에 감사하다. 나는 무책임하였으나 하나님은 책임지셨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이에 주를 인정하고 주 앞에 나를 바로 세우는 일. 다른 이의 티를 지적하기보다 내 눈의 들보를 보는 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면 늘 그 속에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한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6-17).” 말로야 누군 못할까? 나야말로 말뿐이란 생각을 자주한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 안의 주의 영도 아신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묵상 글을 읽을 때 부끄럽다. 뭘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그것을 글로 쓸까? 하고 생각하다 나보다 정직함 앞에서 새삼 나의 위선을 돌아보곤 한다. 그러므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그러자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저가 싫어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듯 내가 주를 사랑함에 있어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을 항상 염두에 둔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어진 상황에서 범사에 주를 인정하고 이에 그 모든 일에 주를 바랄 때 기뻐하신다. 즐거울 땐 찬송하고 슬플 땐 기도하는 것.
바울은 되물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갈 1:10-11).” 그러므로 주의 뜻을 따른 고난은 감내하며 순종함으로 복이 있다. 하여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주님은 오늘 바라새인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심은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3-4).” 곧 저들의 이율배반적인 삶을 지적하신다. 하여 저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7).” 어쩌면 우린 이를 물리치기 어렵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저들에게 갈채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8, 10).”
그러므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12).” 이와 같은 말씀은 성경을 관통하는 겸손의 기본이다. 그런데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 내가 두려워하여 종종 마음을 졸이는 이유는 이것이다.
어쩌다 거반 세월을 선생으로 살았다. 글쓰기는 다른 과목과 달리 저들의 속이야기를 끌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들어야 하고 듣다보면 뭐라 위로도 해야 한다. 혹은 나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하면서 주의를 주어야 한다. 그럴 때 의도했든 안 했든 나의 말은 제안이 되고 충고는 억압이 된다. 거기에 나의 감정도 더해져서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과장하거나 덧씌워져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기도 한다. 은연중에 바라게 되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괘씸하게 여기기도 한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5).”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이 두렵다.
나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어 불안하다. 그뿐인가?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16-17).” 행여 나의 판단이 또는 그에 따른 나의 경험이 토대가 될까 하여 특히 나는 될 수 있으면 설교 중에 예화를 드는 일도 꺼린다. 공교롭게도 본문은 까먹는데 예화는 오래 기억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 누가 종종 나더러 상담하지 말라 하며, 나의 과잉감정이입에 대해 우려를 말한다. 나도 저의 말에 공감한다. 그런데 내가 저의 아픔이나 슬픔을 같이 느끼지 않으면 저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가 온전할 수 있을까? 말로는 구하나, 내 일이 아니어서 어떻게 간절할 수가 있겠나? 문득 드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을 좋아했다. 저는 첫 시간에 시를 가르치고 다음 시간에 서로의 창작시를 숙제로 내주었다. 그리고 수업 중에 내 이름을 부르며 특별활동을 문예부로 들어오라 하면서 저가 나의 시를 낭송하였다. 그리고는 여느 문예공모를 추천하고 개인적으로 글쓰기를 봐주었다. 여름방학에도 몇몇을 집으로 초대하여 라면을 끓여주고 문학을 논하였다.
저가 몸이 약해 교단을 떠나야 할 때 나는 혼자 교회에 앉아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다. 겉으로 드러내어 말은 안 했지만 저의 빈자리는 내게 충격이었다. 물론 다른 국어선생에게 나를 부탁하였는데, 저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곁에 앉은 영어선생이 내 글을 모두 가지고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해 동아일보에 당선된 기형도의 <안개>를 오려 저는 수업 중에 슬쩍 건네기도 하였다. 앞서 국어선생의 남다른 관심과 해주었던 말들, 이어 영어선생의 투박하면서도 무대뽀인 관심이 아니었다면 나는 과연 문예창작과를 지원하고 문학에 눈을 떴을까? 그래서도 나는 늘 두려웠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문을 같이 여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오늘에 이르러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살게 되면서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러한 사명을 강권하신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내가 죽어져야 내가 전하여져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틔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운했던 일을 말할 때면 일체 변명하지 않는다. 그때의 나를 나는 인정함으로 그럼에도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준 것에 감사하고 고마워한다. 이 모든 게 주의 은혜이었음을 알고 있다. 아이들도 안다. 나는 내가 존경 받는 아버지나 어른이 되는 일에 주의한다. 목사로서도 누구에게 인정받는 일을 경계한다. 그것은 나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그러므로 교회 같지 않게 작고 별 볼 일 없다 해도, 목사 같지 않게 지극히 평범하고 모자라다 해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나는 주만 보고 간다. 그러하기를 항상 기도한다. 딸애가 어디 큰 교회 청년부에서 활동하며 신앙생활 한다. 처음에 그래도 되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이가 기도해보고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하라고 일렀다. 누가 예배에 나오다 가까운 곳으로 간다고 할 때 나는 기꺼이 그리하라고 이른다. 전에 누가 사당에 살면서 인천까지 온다는 것을 굳이 그럴 거 없다고 하며 같이 그의 집 근처에서 교회를 수소문하여 그리 보냈다.
내가 귀히 여기는 말씀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다. 굳이 그 소리를 모아 남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누군 줌으로 전달되는 내용을 유튜브에 올리자는 둥, 오늘 쓰는 이와 같은 묵상 글을 책으로 묶자는 둥…. 나름은 그 의도는 알겠다는데 그때마다 나는 됐다고 사양한다. 나는 오랜 시간 그런 꿈을 꾸며 살았다. 멋지게 등단하고 이름을 알리는 작가로 살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여러 곳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를 알면서 나는 끝없이 사라지고 소멸되어 주의 뜻만이 남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드러나면 주의 뜻이 축소된다. 본디 사람에게 열광하면 저의 말도 귀히 들리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영광은 초라해진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르시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곧 ‘나를 보내신 이’, ‘이를 믿는 자’로 모든 영광이 아버지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이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요 5:37).” 이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부디 나의 남은 날들도 그러하여서,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부디 이와 같은 짓을 사역이라 여기며 감당하지 않기를. 부디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6).”
남들이 뭐라 해서가 아니라, 내가 주 앞에서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9).” 그러므로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진정으로 주께만 인정받고자, 행여 내 안에 사람을 바라는 마음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이에,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48:1).
오직 주만이 위대하심으로 찬송 받으시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9-10,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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