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전봉석 2023. 12. 7. 06:00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막 5:34, 36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11

 

 

여러 군상의 다양한 삶이 있다. 저마다의 고충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심하다. 열두 해나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누가 알아주었을까?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린 자의 거칠고 고단하였을 삶을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열두 살 된 딸애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회당장의 마음을 누가 알기나 할까? 우린 저마다의 슬픔과 눈물을 머금고 산다. 일일이 설명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괴로움의 무게다.

 

예수님은 마치 그런 곳만 찾아가신다.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2).” 문득 딸애가 한 말이 생각난다. 아빤 왜 꼭 그런 사람만 꼬이더라! 여기서 ‘그런 사람’이란 오늘 본문의 여러 군상과 다를 게 없다. 실은 저마다 남모를 짊을 지고 산다. 생각해보면 목사가 되기 전에도 ‘그런 사람’은 항상 있었다. 저들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나는 애써 외면하고 살았을 뿐이다. 글방이었을 때, 그때도 아이들 가운데는 그런 경우가 있었다. 유난히 밝았던 아이가 실은 ‘은따’였고, 그렇게 아빠 자랑을 하던 아이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쁘고 근사한 몸매를 가진 아이는 실제 거식증을 앓고 있었고, 뭐라 나무랄 데 없이 성실하였던 아이는 부모의 결별과 외면으로 사랑받고 싶어 했다.

 

이러한 사실은 목사가 되고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적당히 타협하고 지냈다. 괜한 일에 끼어들거나 연류되기 싫어서 ‘다루기 힘든 경우’는 가차 없이 글방에서 끊었다. 목사가 되고, 그러니까 주의 사랑에 두 손 들고 항복하고 난 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이는 내가 비춘 게 아니라 나로 그 빛 가운데 드러나는 ‘산 위에 있는 동네’를 보게 하신 것이다.

 

전에는 안 보이던, 보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상한 영혼이 드러나면서 딸애의 말은 그런 의미이다. 나도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치부가 가려질 수 없는 삶을 산다. 이를 숨기고,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하며 사느라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자신조차 감쪽같이 속이는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살았을 텐데… 예수 앞에서 우린 무장해제 당한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 그러던 이가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7).” 하며 주를 인정한다. 후에 저의 안에 ‘군대 마귀’가 들어있음을 실토하고,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볼 수 있다(15). 또한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18-19).” 우리가 일상에서 주를 인정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큰 기적 같은 일인지.

 

해서 지혜는 말하길,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지혜와 우매가 공존한다. 다소 역설적으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이를 풀어 묵상하면 내 곁의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정상이고 기회가 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우리가 말씀 앞에서의 위선이라니! 병원에 가 의사 앞에서 점잔을 떠는 꼴과 다를 게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를 가리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가 치부가 된다 해도 이로써 기도를 구한다. 나는 감사한 일이 나의 가까웠던 친구 가운데 주 안에서 서로가 발가벗은 듯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실은 친구 사이에도 가릴 거 가리고 체면과 위신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다. 남들보다 더, 행여 나의 치부가 드러날까 하여 조심스러워하면서….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서로를 대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체면이고 뭐고 그게 무슨 소용이람?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22-23).”

 

또한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그 사이에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25, 27).” 앞서 체면도 행여 구차스러운 것 같으나 그 어떤 위신도 소용이 없다. 저는 예수시다. 이를 알고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었을 때,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9).” 물론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또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6).” 주는 다만 우리 곁에 계셨다.

 

이를 보이심은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곧 우린 격이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며 성도의 교제를 운운하는 사교적인 모임의 사람들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유한마담’으로 또는 적당한 친절로 타인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저는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몰려다니며 같이 보고 놀라고 기이히 여기며 간증이랍시고 떠들 수는 있으나, 진정 주 앞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못한다. 행여 같은 교회 교인들이 알까 하여 쉬쉬하며 점잖을 떤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군상은 이상할 정도로 ‘그런 사람들’만 예수와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다. 나머지는 구경꾼이거나 호기심에 몰려다니는 군중일 뿐이다. 우리가 주께 나오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 의사 앞에 자신을 내어 보이는 일과 같다. 더욱이 우리는 영혼의 일이다. 상한 심령으로 주께 나온다는 것은 믿음으로 새로운 사이가 되었을 때, 어찌 그런 말까지 내게 하는가 싶게 서로는 자신의 부끄러움도 치욕도 수치도 감출 게 없다. 이는 사람을 보고서 하는 게 아니다. 서로가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우리는 실제 저마다의 비참한 현실을 숨기고 산다. 처가 쪽 누구는 여러모로 성공한 가정이다. 두 아이가 이대, 연대를 나와 번듯하였고, 엄마는 모 은행 은행장까지 지냈고 남편인 애들 아빠는 사업으로 건물을 몇 채 소유하고 장사하는 자이었다.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곧 이혼을 하네 마네, 실은 아들애가 은둔형이 되어 두문불출한지 오래되었고, 강박으로 인해 연대도 자퇴한 뒤 정신병원에도 여러 번 입원하였다고 했다. 아이들 엄마는 자기 탓으로 돌려 미안함에 치를 떨고, 남편은 술만 먹으면 약해 빠진 정신 상태를 운운하며 난리도 아닌 모양이다. 이런저런 사연 없는 가정이 어디 한둘이겠나?

 

기껏 교회 안에서 교수부부로 통하는 두 내외가 실은 서로의 반목으로 각방을 쓰며 산지 오래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서로의 모진 말로 생채기를 내기 일쑤인 곳도 있고…. 아빤 왜 다들 그런 사람들만 꼬여?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던 딸애의 말이 정상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저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런 가운데 나 역시 ‘그런 사람’으로 살았었던 때를 떠올리며 주의 은혜에 감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린 모두 비정상적인 삶이 정상인 세상을 산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마음은 상했어도 겉으로는 ‘친절한 타인’이 되어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라! 언제까지 이와 같은 위선으로 덮을 수 있을까? 우린 선포해야 한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 3:8).”

 

먼저는 자신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끝도 없이 위선과 가증스러운 몰골을 한 괴물로 산다. 어디 성경공부를 드나들고, 같이 어울려 티타임을 하며 우아함을 떤다 한들? 속은 썩어나서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겉으로 어울리는 사람이나 보이는 거짓 웃음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꾸며낼 수는 없다. 하여 우리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 15:14).” 서로의 속엣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서로에게 작은 예수가 된다는 구호는 한낱 낭만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주의 이름으로 털어놓지 못한다면,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39-40).” 그럴 때 누구도 그 현장에 있지 못하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41).”

 

우리가 그 현장에 있으면서도 정작 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음으로이다. 그저 크게 놀라워하는 저들 앞에서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43).” 곧 우리의 신앙은 마치 청맹과니와 같아서 눈을 떴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보지 못하는 눈으로 산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우리로 주 앞에 서게 하심은 우리 곁의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심이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믿는 자로 살면서 안 믿는 자의 문화에 젖어 타협하고 몰려다니며 군중으로 서 있을 때는 모른다. 내가 실은 남모르게 ‘혈루증 앓는 연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과 심지어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로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 결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멀찍이서 따르며 구경하는 구경꾼으로는 몰려다닐지 모르나, 정작 우리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일어나라” 하시는 데도 이미 일어났다고 우기며 새삼스러운 듯 멀찍이 서서 설왕설래 말 많은 성도로나 살고 있지는 않은지….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시 58:2).

 

과연 더는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의 달라진 모습은 무엇일까?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1).

 

얼마나 주를 찬송하며 살고 있는지…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99:5).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고 있었음을.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저의 말을 하려다, 그게 나였음을 인정하며 이 글을 쓴다. 남 얘기 할 거 없다. 오늘 본문의 여러 군상 가운데 나는 과연 누구일까? 어디에 속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말씀은 그렇게 오늘도 나를 쪼개어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여,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58: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