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막 7:8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시 60:5
일체의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할 때 안 믿는 자와 같이 다툼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종종 나이기 전에 그리스도인인 것을 명심하려 한다. 가령 교회를 이전하면서 인포메이션의 문구를 바꿔야 하는데 우리 것을 바꾸면 그 자리에 있던 이의 상호가 지워진다. 저도 옆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전체 건물의 것을 바꾸는 데 6만원이 들었다. 저의 입장에서는 생돈이 드는 셈이고, 관리소에서는 원칙대로 내 것만 바꾸면 된다고 하였다. 이럴 때,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눅 6:29).” 이와 같은 말씀이 나를 붙든다.
또 누가 어떤 일을 하고 내가 셈하기로 한 것보다 얼마를 더 얹어서 식사라도 하시라며 주는 것은, 직무를 다하지 못한 어느 청지기의 경우를 생각하여서이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눅 16:3).” 하여, 주인의 것을 가지고 주인에게 빚진 자의 것을 탕감하여 주며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5).” 묻고 이를 감하여준 것이다. 상식적으로 주인이 이를 꾸짖어 벌을 더하실 것 같은데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9).” 하시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0).”
곧 손해보고 양보하는 일 같으나 실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오히려 주가 더욱 넉넉하게 부어주심을 느낀다. 무슨 말 끝에 친구는 셈이 바르고, 내가 하는 일처리가 탐탁지 않았는지 차용증이라도 써두라며 성화였다. 그런 걸 저에게 일러 그러기에 앞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먼저 생각하자고 일렀다. 저의 말이 맞고, 일처리는 그렇게 하는 게 낫다는 것을 어찌 모를까. 그럼에도 행여 손해를 본다 해도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0-11).”
우리는 원칙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 산다.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셈이 바른 삶을 사는 게 아니다. 곧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전하여진다는 것은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며 저의 성화를 누그러뜨리려 하나 저는 문득 자신이 병적으로 자기 것을 내어줄 수 없는 성향의 사람인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곧 우리는 세상 기준의 것을 버리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어렵다. 당한만큼 되갚아야 하고, 당하기 전에 미연에 손해 볼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는 우리가 받은 은혜의 깊이를 바로 알 수 없다. 곧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노예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이 예수를 영접하고 목사가 되었다. 저는 어찌나 순하고 늘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는지 주변에서 늘 저를 뭐라 하였다. 그러자 저는 내가 수렁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수렁에 있는 자들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나? 하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나야말로 그런 인간이었다. 사람 관계에 있어 저가 싫어하는가 싶으면 내가 먼저 저를 싫어하였다. 혹여 손해를 볼까 하고 담보를 잡았고, 심지어는 살던 곳의 주인이 자기 것을 챙기는 것 같아서 내가 설치하였던 전선까지도 모조리 뜯어다 버리고 이사한 적도 있다. 모질고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거기에는 원칙대로 하는 것이어서 남에겐 엄격하게, 나에게는 관대하게 그리 굴며 살았다. 이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더러는 손해가 되고 저들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때로는 이와 같은 말씀이 터무니없고 불가능한 일일 것 같으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결코 과분하지 않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어제는 장모와 같이 저녁예배로 앉아 이 한 구절의 말씀을 두고 감격스러워하였다. 우리가 받은 은혜로는 그 어떤 손해도 손해가 아니다. 곧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5).” 죄가 없으신 이가 나의 죄로 인하여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은혜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 가령 우리가 살면서 어떤 장기 이식을 받아야 할 때 가족도 아니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자신의 장기를 주어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여 살 수 있게 한다면 두고두고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살지 않겠나? 하물며 우리 영혼의 문제로 영생을 두고 저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산 것이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우리의 통회함이 은혜를 알지 못하는 데도 가능할까?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몇이 전통을 운운하며 제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을 인용하여,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 즉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7).” 하시면서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16).” 정작 우릴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리신다.
사실 말씀은 세상의 전통이나 윤리에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도리를 완성하게 한다. 그럼에도 어찌 성도들마저 말씀대로 살기가 어렵다고 하는가 하면 끝없는 욕구 때문이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덧붙여 의미를 확대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완력으로 무엇을 구하려는 버릇을 의식한다. 나의 고약한 성격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앞서도 얘기한 것처럼 나는 가령 누구랑 사귈 때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그럴 거 같으면 내가 먼저 거절하였고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오죽하니 누가 넌 참 차갑고 냉정하다, 하는 소리도 했다.
이는 일찍이 늘 당했던 것 같은 피해의식에 따른 방어기제다. 어릴 때야 일방적으로 그러했다 해도 철이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악한 종’이 되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마 18:26-28).” 저가 나였다. 나는 은혜를 받았고 이에 감사해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이를 갚으려하지는 않았다. 용서도 사랑도 받을 줄만 알았지 줄 줄을 몰랐다.
그런데 은혜를 알려면 상대적으로 내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가를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다. 나의 죄 된 모습이 받은 은혜의 값을 더한다. 받은 게 많으면 주는 데 인색하지 않고, 손해를 손해라 여기지 않는다. 나 역시 주의 것으로 선심 쓰듯 서로의 마음이 상할까하여 내가 먼저 감수하는 게 낫다. 이는 나를 더럽히는 게 실은 나였다는 것을 알면서이다. 나는 나를 깨끗이 할 수 없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곧 나는 그럴 자격이 안 되면서 그리 된 자여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내가 아는 나만 해도 그렇듯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주의 은혜를 받은 자는 주 앞에 설 때 자신의 부끄러움을 안다. 내가 어떠했는지, 일일이 기억하는 것을 실토하고 살아야 한다면 나는 수치심으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이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나는 이제 이보다 더 좋은 수를 알지 못한다. 그래놓고도 행여 누가 또 인정해주고 알아주는 것 같으면 슬그머니 우쭐하는 마음이 든다. 상대적으로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으면 기껏 그러했던 마음이 사늘하게 식어 상대를 괘씸히 여긴다. 그러니 나란 사람, 그야말로 구제불능이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과연 나는 그러할 수 있기는 할까?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은연중에 내 안에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쓰면서도 누가 좋게 여겨주길 바라는 마음이 앞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하여 나의 나 된 것을 주 앞에 고백하며,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60:1).
나는 나로서 은혜 받을 자가 못되나,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4).
그리하여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 같은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새벽 제단을 지킨다. 말씀 앞에 앉히고 나로 주를 바랄 수 있기를 구한다. 그러할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2-13).” 그러므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5).
이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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