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전봉석 2023. 12. 8. 05:22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막 6: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6-17

 

 

가족 사역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접하는 일이다. 서로 늘 같이 보며 자란 사이에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로 영접하기란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하물며 가족을 불가근불가원이라 한 것도 가까이 할 수도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어느 정도는 그러해야 하는 관계이다. 가족들에게 인정받는다는 일이 어려운 것은 너무 가까워서 지근거리의 삶이 덕이 되지 못하기도 하다.

 

그러하여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누가 홈스쿨링을 한다고 할 때 나는 주저하는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은, 앞서 서로에게 너무 의존적이라 또한 배타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가끔은 성령으로만이 할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믿음을 두고 스스로 자부할 때가 있는데, 나의 믿음이란 게 얼마나 감정적이고 즉흥적인지,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하물며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으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곧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값없이 주신 선물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에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의지적이고 자의적인 일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나 생겨나는 마음이었다. 이에 오늘 예수님도 그 일가친척과 늘 곁에서 같이 보고 자란 동네에서 배척당하심이 이상할 게 없다. 사람은 본디 각자의 선입견으로 상대를 대하고 이해하는 능력밖에는 없어서,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3).” 하는 오늘 말씀이 이상할 게 없다.

 

어릴 때 겪었던 것이 나에게는 큰 교훈이 된다. 나는 싫든 좋든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아버지의 교회에서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 그럴 때 가정에서의 아버지와 교회에서의 아버지, 가족에게서의 아버지와 교인들에게서의 아버지는 달랐다. 남들에게 친절한 것 반만 우리에게 친절하였으면… 하는 생각으로 어린 나이에도 그러한 게 상처가 되었던가보다. 어떨 때 강제적으로 종교와 신앙이 강요당했고, 마치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듯 교회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돌아보면 그게 큰 은혜였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어쩌면 그러한 복을 자주 잃어버리곤 했던 것 같다. 예수님의 형제와 그 마을 사람들도 다를 게 없다. 내가 이제 주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좋고 좋으심을 전하는 데 있어 가족이 때로는 더 어렵다. 이는 물론 내가 저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이유도 크다. 예수님의 경우는 사람들의 선입견이 문제였다면 나는 나의 허물과 실수가 그 실상을 이룬다. 말씀을 전하다 평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로서 그와 같이 설교하려니까 민망할 때가 있다. 가족들에게는 더욱이 그러하다. 한 다리 건너고 두 서너 다리를 지나서 아는 사이면 누구라도 존경하고 귀히 여김을 받을 텐데….

 

그래서도 나는 누가 가정에서 아이를 가르치겠다고 할 때 그 부모로서의 행실과 삶의 모습이 있는데 아이가 이를 보고 배울 게 있는가? 하는 질문을 은연중에 던졌다. 물론 싫은 소리이지만 사실이어서 늘 보고 느끼는 게 있는데, 자신들의 모습에 더해 산교육이 그 가정에서 이루어지기란 먼저 스스로의 싸움이 치열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여…. 듣기 싫은 말이어서 전에처럼 연락이 오지 않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나는 저들에게 주께 맡기는 것 같이 아이는 아이대로 두고 본인들의 사역과 생활에 전념하여 주 앞에서 성실하기를 말하였던 것 같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

 

자칫 우리를 속이는 것은 우리 자신이었다. 나는 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한참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고, 성실하였어야 할 때에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던 사람이라… 그럼에도 주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오늘에 돌이켜 주의 일을 맡기시기까지 아이들을 돌보시고 바르게 성장하도록 해주셨다. 나는 이제 말씀 외에는 달리 아이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요즘은 저녁에 들어가 장모와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아이들이 같이 와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전할 뿐이고, 그 시간을 엄수할 따름이다. 저들로 행하여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카리스마가 필요한 게 아니라 성령을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면 족하다. 더러는 곁길로 가고, 내 뜻과 맞지 않다고 해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곧 우리에게는 비현실적인 그러나 지극히 이성적인 과정이 있다. 현실적이지 못한데 이성적이라는 말이 어불성설인 듯하나 믿는 자로서 주가 주시는 지혜가 있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1-12).”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있는, 자식이나 한 성도로 마주할 수 있는… 나의 마음에 그와 같은 마음을 더하셨을 때에야 나는 알았다. 주가 함께 하심으로나 모든 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특히 자식 일에 대해서는 더욱이 다 큰 자식에게는 자칫 훈계가 노여움이 될 수 있는 일이어서, 나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설교로 전한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되도록 입을 다문다. 수시로 기도할 뿐이다. 이젠 뭐라 하여 서로 듣거나 듣게 할 수 있는 나이도 지났다. 하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가족으로 인하여 성령을 구하는 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고로 하나부터 열까지 성령으로 하시게 할 때 나의 마음도 자식들이나 가까운 이의 마음도 상하지 않는다.

 

말에 실수가 없을 수 없고 행함과 가르침이 하나일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가장 먼저 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어서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4-5).” 억지로 어찌 무엇을 하려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이르시기를,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7-9).”

 

곧 우리의 삶이 전도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아서 무엇을 준비하고 마련하여 내가 뭘 어찌 하려는 생각 그 자체가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데 주의하게 하신다.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10).” 보면 늘 같이하게 하시는 이가 있다. 저가 왜 내게 이러는가, 싶을 정도로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 나를 주의 종으로 여겨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볼 때 송구하다. 설마 그것이 나를 보고 하는 일이겠나? 물질적으로나 마음으로 합심하여 일심으로 다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주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어서 이는 강요하거나 요구해서 될 일이 아닌 거였다.

 

누가 10년이 넘게 항상 교회를 후원하고 때를 따라 섬긴다. 어떤 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주의 이름으로 헌금을 보내온다. 나는 저들에게 일일이 고마움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물론 송구하고 민망하고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늘 먼저 앞선다. 나도 모르게 더 성실하고 치열하게 주를 바라며, 이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을 다짐하게도 된다. 저들의 섬김은 심음의 원리와 같아서 나에게 더하는 게 아니라 그 밭에 심음으로 주가 이루실 수확을 기대함이다. 분명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로 더하실 것을 두고, 나는 할 수 없으나 그리하실 이를 알고 바란다.

 

상대적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11).” 더러는 미련이 발목 잡을 때도 있다. 그럴 때보면 유독 서운함이 큰 경우이다. 그럴 때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하여 나는 내가 하려고 하는 마음을 죽이고, 나를 드러낼까 하여 주의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묵상 글도 행여 나를 나타낼까 하여 자주 신경을 쓰곤 한다. 물론 말씀이 나의 생활을 다루지 않으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여 나는 묵상을 글로 쓰지만 이것으로 책을 묶거나 인위적으로 무엇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은 주의한다.

 

마음을 다한다는 일은 주를 부르는 일로,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하여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늘 나에게 필요한 게 겸손인 것을 되새긴다. 누가 헌금을 보내오면 고개를 숙인다. 받을 자격은커녕 아무 것도 보답을 할 게 없어 기도뿐이다. 주께서 마치 나의 아이들을 나와 상관없이 주 안에서 기르시고 신앙으로 양육하신 것 같이,

 

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빈자리나 누추함에 대하여도 주께서 하실 일로 돌린다. 나는 다만 내 자리를 지킴으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교인이 없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책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러는 동안 나의 자세를 염려하고 주 앞에서 바르기를 구한다. 설교원고를 성실히 준비하고 누가 언제 어떻게 올지 알 수 없음으로,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59:9).

 

고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즉 교회 부흥이나 신자의 수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게 아니라, 그러는 동안 나는 얼마나 주를 바라며 주만 바라며 의지하였는가 하는 데 기준을 둔다.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6-7).”

 

오직 주만 신뢰한다는 것은,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130:3).

 

하여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부디 나의 남은 모든 날들은 그러하여서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그러할 때에,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59:10).

 

그러므로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6).

 

아,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