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전봉석 2023. 12. 13. 05:2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10

 

 

기도는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산 자의 몫이 아니다. 다만 산 자는 산 자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이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우리가 아직 살아서 산 자의 입으로 구하는 일은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3-44).”

 

누가 기도를 부탁할 때 나는 저의 마음을 주께 고할 뿐이다. 우리가 아직 살아서 산 자의 몫으로 구할 것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하여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것이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살았다는 것은 아직 소망이 있어서다. 구주를 영접할 수 있는 소망,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소망으로 우리는 산 자의 기회를 귀히 다룬다. 이에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 45:23).”

 

우리 믿는 자의 기본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을 바로 잡는 것이다. 누구와 대화하다 저의 관점에 대해 나는 그리 확신하였다. 성경이 옳다. 성경 외에 말씀은 없다. 우리의 상상력은 허약할 뿐이다. 그런 가운데 마치 ‘틀리다’를 ‘다르다’로 확신하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는데, 믿음으로의 삶은 아닌 것은 아닌 것이지 아닌 게 다른 게 되지는 않는다. 이에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6-7).”

 

나는 오늘 말씀을 접할 때마다 산 자의 나약함에 치를 떤다. 곧 저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경배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8-10).” 저들은 그때 무엇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고작 며칠 뒤 예수를 대신하여 살인강도를 놓아주라 외치고, 그 죄 값을 자신들의 후손에게 돌리며 돌변하였다. 호산나, 하고 외칠 때만 해도 누가 그 일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니 산 자의 상상력이나 합리적인 판단이란 게 얼마나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그러나 우리는 아나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9).” 성경을 우리는 말씀으로 알고 이 외에 다른 구원은 없음을 타협할 수 없다. 점점 더 사람 중심으로 흘러가는 사회에서 사람의 상상력이 사람들의 영혼을 좀먹고 있다. 나는 누구의 기도부탁 내용을 문자로 받고 뭐라 답을 해야 하나, 한참을 놓고 생각하다 다음으로 미루었다. 저는 죽은 모친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있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드는 것, 성경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은 아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말씀의 생명이 우리를 이끌고 붙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믿음이었다. 믿음은 자유의지에 따른 자기결정의 결과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리치며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저 많은 산 자의 외침이 곧이어 돌변하게 될 저들의 외침과 중첩되면서 나는 두렵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말, 세 치 혀를 나는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 생각이 앞서고 상상력이 날뛰는 데서 나는 나의 ‘꿈꿀권리’를 두려워한다.

 

말씀 안의 생명이란,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그때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 위에 말씀이 더해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2).” 이로써 창조는 질서를 가지게 되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하여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처음이고 나중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영혼의 공전과 자전을 인정하고 느끼고 주를 바라게 된다.

 

진리는 두 개일 수 없고, 그리하여 ‘다름’의 또 다른 무엇을 인정하는 게 아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런데 그 어떤 다름을 일컬어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소리인지? 호산나, 하고 외치던 자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막 15:11, 13-14).”

 

이것이 우리 산 자의 실체이고, 우리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였다. 죽은 자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이를 아는 것이 아직은 살아서 산 자의 상상으로 믿을 수 있는 소망이겠다. 하여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믿는 아무개와 대화할 때도 동성애니 어떤 기호에 대해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이다. 어느 목사가 무슨 대담프로에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들으면서 저 또한 아직은 살았으니 저런 소리라도 하겠거니, 하고 생각하였다. 여느 종교지도자들의 입에서는 허용하고 인정하는 말들이 거침없는 가운데 그래도 목사는 말씀에 말씀하고 있는 바를 가지고 말하면서도 애매하게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것을 들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다수인가?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에 둘이 열을 상대할 수 없었던 논리와 같은 것일까? 결국 저들의 선택은 ‘광야 40년의 길’이었고, 오늘의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쑥대밭으로 뭉개놓고 있다.

 

두려운 것은 죽은 자의 선택이 아니라 산 자들의 선택이다.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6-17).” 예수께서 곧 죽음을 앞두시고 화를 내시는 이유는 산 자들을 위한 거였다. 그런데 정작 산 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 또한 아이러니하나 산 자들의 선택에 달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살아서 산 자의 몸으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진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5).”

 

그러므로 우리가 다름을 운운하는 그 이상의 것을 주께로 드려질 때, 곧 우리가 그처럼 도도하게 간직하려는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때, 살아서 처음이나 나중이나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곧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1-2).

 

이와 같은 송축이 산 자들의 특권이었다. 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또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곧 우리가 영원을 사모하고 영생의 나라를 소망하며 주를 바라는 것은 아직 살아서 산 자의 몫으로 구할 수 있는 정당한 간구이다.

 

누구의 문자 한 통을 놓고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은 답을 미룬 것도,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1-32).”

 

분별할 수 있는 능력도 산 자에게나 필요하였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이에 살았으나 죽은 자로 사는 영혼이 가장 불쌍한 것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4:1).” 오늘 우리가 산 자들의 땅에서 산다고 하나 죽은 영혼들과 다를 게 없는 산 자들도 있는 것일 테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2-23).”

 

정작 믿음은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4).”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하여 말씀의 생명으로 우리가 붙들려 사는 것이라,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18).” 이를 의지함으로, 오늘의 여러 현상에서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게 된다. 아니면 금세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은 소망이 있다. 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저가 마음도 생각도 아닌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우리가 아직은 살아서 몸을 입고 사는 까닭이겠다. 이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나는 오늘도 졸린 눈을 뜨고 새벽을 달려 주의 말씀 앞으로 내 몸을 쳐 복종시킬 수 있었다. 아직은 살아서 산 자로 주 앞에 나를 세운다는 일은 그리하여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위하여 오늘 하루도 생명을 연장하심일 테고….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64:1-2).

 

아니면 단 하루도 온전히 주를 바랄 수 없음을. 언제 나 또한 호산나를 외치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어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나는 동시에 두려운 마음도 함께 주 앞에 내어놓으며,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5-6).

 

세상은 우리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임을 확신하고, 나 자신 또한 그와 같은 세상에 속하여 사는 일이어서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행여 나는 아닐까, 하여 주의 도우심과 긍휼하심을 바랄 수 있는 데 소망이 있었다. 내가 아직 살아서 산 자의 목소리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