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전봉석 2023. 12. 15. 05:01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막 13:37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9-12

 

 

아이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멋대로 굴며 사회성이 떨어진다. 모친의 마음은 어떻게든지 아이를 보호하려는 요령으로 홈스쿨링을 구상하였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나 엄연한 현실도피였다. 부모로서 자신들의 주어진 삶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나는 애써 외면하듯 모르는 척하다가도 어떤 기억, 나의 유년의 때와 마주할 때면 아이 생각을 하였다. 그렇듯 마음은 저 혼자 시달리다 애써 저들을 만류하고 싶었다.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술렁거렸다. 그때가 언제인지, 어떤 징조가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해 하였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2).” 이와 같은 예수의 말씀에서 불안하였는가?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물었다(3).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하는 저들의 심정과 오늘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의 마음은 같을 것인가(4).

 

먼저 주님은 이르신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5).” 미혹이란 무엇에 홀린 듯 정신이 팔리는 일이다. 갈팡질팡 헤매는 것이다. 이러자니 저렇고 저러자니 이러한 현실을 두고,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 홈스쿨링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그 내용을 상세히 물었고 정말 그러할 것인지 재차 확인하였다. 다른 대안이 없는 듯 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지금의 생활 자체로는 아니한 만 못하다고 허를 찔렀다. 듣기 싫어할 줄 알면서도 저들의 실상을 말하였다. 저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 가운데 가정에서의 학습과 그에 따른 지도로 가능하겠는가? 나는 저의 선택이 현실도피로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를 더욱 주저앉히는 꼴이란 사실을 쏟아놓듯 지적하였다.

 

우리로는 할 수 없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8-20).”

 

주께 맡긴다는 것. 어쩌면 이는 겉으로 비춰지기에 무책임하다. 모질고 야박하기도 하다. 나의 부모는 그러하였고, 나는 아이와 같이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워했고, 전학할 때마다 학교들은 나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나는 나의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를 사회에 던진 것이다. 학교에서는 특수학교를 권하였고, 나의 모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나의 초등학교시절과 중고등학교 시절은 잔인하였다. 친구들은 물론 교사들에게도 그림자 취급을 당하였고, 그런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오늘에 이르러 이 구절의 말씀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야말로 내 인생의 함축적인 내용이다. 어릴 적 나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고, 어린 것이 뭘 안다고 죽기를 바라며 살기도 했다.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였고 매사 모든 게 불행하였다. 그러니 그때는 알기나 했을까? 원망 가운데서도 나를 돕는 손길은 엄연히 존재하였고, 기억을 더듬다보면 그때마다 내 곁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를 거의 두 시간에 가까이 말해준 것 같다. 곧 아이가 현재 부적응자로 학교생활을 어려워하고 가정에서 응석받이로 고집이 세다 해도 아직은 가능하다.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셈이니까, 하나님은 우리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부여하셨다. 내버려두면 된다. 현재의 관심과 사랑을 거두면 산다. 나는 모질게 말하였다. 저들의 왜곡된 사랑이 아이를 점점 고립시키고 있었다. 어떠하든지 세상 형적은 지나간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으나 어떠하든지 사라질 것이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어찌 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1-32, 35).”

 

나는 저이를 설득하느라 나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오늘에서야 나의 부모가 존경스러운 것은 저들 심정이 또한 오죽하였겠나? 그때는 원망스러워 그저 저들의 냉정함에 치를 떨었으나, 나의 모친은 일생을 성전에서 기도하다 잠들었고 나의 부친은 그러할수록 주의 사명에만 정신을 두었다. 거둬 가시든지, 주가 쓰실 거면 책임지시든지… 하는 심정으로 나의 모친은 모질었고, 나의 부친은 무심한 듯하였다. 저들은 그렇게 나를 일반학교에 두었고, 사회 속에 던져놓았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 속은 우리가 같아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그러니 저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보호하시고 더 나은 온실에 두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하지 않으심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저들이 자식의 그러저러한 약함을 두고 마음을 쓰는 것이야 당연하겠으나 이를 주께 맡기지 못하면 결국 자신들이 떠안아야 하는데, 현실은 자신들조차 변변하게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터라! 나는 외람되나 이런 소리까지 하며 저들의 실상을 알게 하고 싶었다. 말이 좋아 홈스쿨링이지 자기 자식은 물론 남의 아이조차 건사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그렇듯 사회 밖으로 제외되어 보호받는 게 옳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소외고 왕따이고, 지진하고 모자람이라 해도 자신이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일이었다.

 

결국 나는 저에게 제안하길 내년부터 홈스쿨링을 하겠다는 것을 거두면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와 함께 글쓰기를 하겠다고 하였다.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아이가 사회에 부대끼며 스스로에게 허락하신 삶을 회피하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과 그의 비밀에 속한 영적인 삶이 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10).” 이는 살아서 살아봐야 알 일로 누가 설명하여 일반화시킬 수 없다.

 

다만 나는 확신하며 내 안의 증거를 가졌으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하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4).”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살 것인가?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나로 저 아이를 또는 그 부모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답답하게 하시는 이유를 안다. 그러든가 말든가, 한사코 외면하려 하였으나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게 아니라,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10).”

 

그러기 위해 새순이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데도 1톤의 무게를 들어 올리는 힘이 필요하고, 사람도 어려울수록 젖 먹던 힘까지 다 쓴다고 하는데,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11).” 우리의 참음은 단순한 인내의 영적으로 내가 이룰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하여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2).”

 

오늘의 나로 나의 어린 날을 감사하게 하심은 나의 노여움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셨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나의 지난한 삶은 치열하였고, 비오는 날 버스에 올라 학교로 가는 길에도 젖은 난간을 기대앉아 오르고 내리면서도 사회에 속해 살았다. 우리 기독교는 화초로 길러짐이 아니다. 온실에서 고이 접은 떡잎으로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돌리셨고, 약속의 땅에서는 내내 전쟁과 긴장으로 살아야 했다. 나는 나의 비루하였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저이에게 말하였다. 그 나이 때 감당하기에는 힘에 겨운 날들이 많았다. 죽기보다 싫은 날들이었다면,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러나 그러하였고, 그러한 날들을 나의 부모는 한사코 외면하며 주만 바라였다.

 

오늘에 이르러 내가 나와 같은 한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데는 그리하여 나의 지난 시간이 연단이 되어 소망이 되었음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있을 마지막 때의 현상을 알리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6).” 그것이 실제 자신일 수 있어, 스스로에게 속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7).” 곧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8).” 그렇다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하시면서, 결국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하신다(9-10). 곧 나는 나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넘친다. 유년의 그 끔찍하게 싫었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어찌 함께 하셨는지를 얼마든지 증거할 수 있다. 점점 더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12).” 그런 가운데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8).” 곧 어쩔 수 없었노라, 변명하지 마라.

 

부모로서 그 심정이 오죽할까? 자식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것이 몸의 방어기제로 나타나 자주 아프다. 이는 몸이 허약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병이다. 저들도 안다. 알면서도 안쓰러워서 품에 안고 있고만 싶은 것이겠다. 나는 아이를 생각하다 눈물이 났다.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19).” 단단히 각오하지 않으면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기 십상이다. 나는 감히 저들 부모가 각자의 삶에 성실할 것을 단호하게 말하였다. 자신들도 건사하지 못하면서 어찌 자식을 끼고 돌겠다는 것인지! 그러나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20).” 어떠하든지 주의 긍휼하심은 유효하다.

 

부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 하여 주께 맡긴다는 일은,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37).”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 나는 간곡하였고, 생각하고 기도하기를 권하며 시간을 두었다. 더는 뭐라 나설 수 있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우린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간다. 그러므로 가야 할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말씀으로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하여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15).”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나의 모친은 모질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뢰하였던 것이다. 이에,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9-12).

 

길은 결국 도착지점에 다다라서야 안다. 그러는 동안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우리가 길을 나설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5).” 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16).

 

우린 저마다 자신의 노여움으로 찬송할 것이다. 주를 증거하고 그의 살아계심 앞에 감복하여,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7-18).

 

결국 길을 다 마치고 돌아보았을 때,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19-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