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막 12:27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 65:2-3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어두웠던 시간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좋았다가 나중에는 책망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허물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그러한 성령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시 39:11).
자신이 붙들고 살았던 시간이 헛되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종종 가눌 수 없는 몸의 통증으로 주 앞에 아뢸 때 배짱이 생긴다. 그러다가도 ‘아픈 아이’가 점심을 같이 먹자면서 찾아오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어떤 위로를 받는다. 아이와의 대화는 건너뛰며 읽는 독법 같이 대화와 대화 사이의 내용이 뭉텅이로 비워지곤 한다. 처음에는 어찌 이해하려 했다면 이제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대화인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제도 아이가 와서 파스를 사다주고 점심을 가져와 같이 먹고 있다 갔다. 널 위해 이리로 옮기셨나보다, 하고 아이에게 말하자 영적인 일이냐며 물었다.
영적인 일이라… 나는 아이가 남긴 엉뚱한 말에 답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를 들어 말씀하신다.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2, 6).” 우리의 결국이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 영혼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이 중에 있을 때 말씀은 우리 안을 운행하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그런 가운데 드러내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3).” 그리하여 말씀은 말씀으로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하여,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식 밖에서의 일이다. 누구는 망하였는데 비로소 감사가 나오고, 누구는 병들어 죽게 되어서야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우리로서 이 하나님의 좋으심 가운데서 함께 누리고 영광 중에 거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3).” 곧 있을 안식을 사모하며 산다. 이때의 외마디 비명 같이,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31:19).
이를 위하여,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개인적으로는 모든 성경의 진리가 함축되어진 말씀으로 이해한다. 곧 우리 사람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아플 때, 혹은 어려움 가운데서 주를 바랄 수밖에 없을 때,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2:9).” 그러한 것을 우리가 엿보듯 맛보아 알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고 힘들어 마음이 까부라지다가도 이것이 은혜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러려고 여기에 두셨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뜬금없는 아이의 말 한 마디, 영적인 일이에요? 하는 소리에 처음에 그런 말이 왜 나오나싶다가도 오래도록 되새기게 하는 것과 같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주인, 곧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에서의 열매를 원하시는데, 이 열매는 먼저 회개이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8-9).” 다음은 성령의 열매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에 주의 사랑으로 기쁨을 알고, 화평 가운데서 오래 참음으로, 참음으로 양선을 배우고, 충성으로 온유를 알게 되는데 이 모두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절제가 뒤를 지키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앞에서 이끄시고 말이다. 이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이상하지? 어제의 묵상과 저녁에 드리는 예배에서의 말씀과 오늘 아침의 말씀과… 말씀은 말씀으로 이어져 그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 나로 주를 인정하게 하심에서부터 아이의 엉뚱한 말 한 마디에서 정답을 추론하는 일에까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아주 가끔은 아무에게도 말하기 싫은 어떤 일로 하나님과 씨름하듯 골이 잔뜩 나있다. 더러는 아프다는 소리가 나 자신에게도 지겨울 때가 있는데 아내나 가족에게 한들, 이와 같이 글에 쓰는 일도 식상할 정도여서 또? 하고 짜증이 먼저 올라온다. 그렇게 퉁명스럽게 나는 하나님 앞에서 토라져 있을 때, 그것으로 천국을 사모하고 사모하는 만큼 빼앗아 그 나라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데까지 이른다. 빨리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그에 앞서 내가 주 앞에 내어놓을 열매를 생각한다.
아픈 것도 일이라고…. 나는 나의 아픔으로 누구의 어려움을 그리 이해한다. 어려워할 때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복이었다고, 나는 저에게 말로 할 수 없을 때는 속으로 그리 위로한다. 정작 두려운 일은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 13:9).” 오늘도 기다리심으로, 내가 더하시는 고통이 이를 알게 하는 것과 같이. 비록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가지고 주 앞에 설 때의 그 심정이 가장 절실하며 단판을 지을 심정으로가 아닐까?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암송할 때마다 느낌이 다른 이 한 구절에서 나는 욥의 결연한 의지, 오기 같기도 하고 객기같이도 한 경이로움을 배운다. 그렇지, 내게 두시는 어떤 고통으로 나는 오기가 나서라도 주를 신뢰한다! 이때에 그 선택이 내 몫이 아니었다는 것에서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그러하다면 이 모든 일의 결국도 주가 더 잘 아실 터, 나는 아플 때 아파하는 게 일이었다. 일이 없을 때 외로워하면 된다. 어려움이 터졌을 때 기꺼이 어려워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그런 상황 속에서 주를 인정하는 일. 욥처럼,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께 아뢰겠다! 이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지경에서 인정하게 하시려고, 저들에게 ‘광야 40년의 길’도 그러했을 것이고, 앞서 노아의 ‘120년 방주 짓는 일’에서도, 아브라함의 ‘무모한 길’ 위에서도 말씀을 따라 그리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나는 아이가 회사 사람들을 운운하며 누가 무시하고, 또는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고 할 때 그것이 망상일지, 사실일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럼에도 주를 바라고 주를 인정하기를… 아이에게 이를 설명하려는데 서로가 넘기는 책장이 다른 것처럼 대화는 겉돌았으나 나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배운다. ‘영적인 일인가요?’ 이 뚱딴지같고 느닷없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하는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말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이러한 말씀으로 나는 내게 책임을 묻는 자책의 무게를 덜어놓는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이 자리를 다함으로 여기에 두신 이의 뜻을 인정하는 일이었으니… 아이를 ‘아픈 아이’가 아닌 한 영혼으로 대하며 반가운 친구 같이 또는 가장 준수한 성도와 같이 우리 교회의 중심으로 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어제는 문득 이 아일 위하여 교회를 서둘러 옮기셨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이 일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2:12).
우리가 주와 입맞춤은 주신 상황 속에서 온전히 주를 먼저 바람이었는데,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막 12:17).” 굳이 나누어 싸울 거 없다. 이와 같이 명료한 진리 앞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24).” 언제까지 오해할 수는 없는 일. 아프면 아픈 데서, 어려우면 어려운 일로, 우리의 환난은 주를 바라는 온전한 지름길이 된다. 이를 느낀다는 것과 이로써 하나님을 부른다는 일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27).” 내가 아직은 살아서 이 땅에서 더욱 거두어야 할 열매가 남은 것이었으니,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65:2-3).
오늘 시편의 기도를 읊조리며 나로 늘 흐트러지게 하는 허물을 용서하여주시기를. 곧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내가 나로 고통 중에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심이 증거였으니, 행여 이 처음 사랑을 잃을까 하여,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하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알고, 그와 같은 앎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의 그 확신으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그렇게 나는 아팠고, 아픔으로 주의 사랑이 간절하였으며, 그것으로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오늘의 이런저런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를 살리는 ‘영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1-2).
주 앞에 나올 수 있는 게 복이었음을, 그것으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4).
곧 우리의 만족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5).
하여 그 응답을 받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런 가운데서도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0-12).
그리하여 나의 사는 날 동안,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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