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 14:50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 67:7
처음 창조하심과 재창조 곧 우리를 조성하심이 없다면 우린 모두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 좋을 때야 누군들 목숨이라도 장담하지 않을까? 한데 막상 위급한 상황에서는 심지어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52).” 혹시나, 하고 마음을 다잡고 다짐을 한다지만 사람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을 주의 영이 새로이 조성하심인데,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8-19).”
말씀을 부탁하셨다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이 믿음이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이에 은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때가 차면 불의한 자도 불의를 위해 쓰인다. 오늘 1-2절,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지금의 우리로서는 어찌 그러한가? 하고 의아할 정도이나 이는 수시로 우리 일상에서의 일이다. 이에 대해 요셉은 정리하였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곧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 오늘의 어려움이나 어떤 불행한 일을 두고 속단하지 말 것은 이를 가지고 어찌 선을 이루시려고 그러시는가, 하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나는 이 말씀을 나의 일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도 누구에게 그리 위로하였다. 아이가 늦되고 뒤쳐져 당장 그 속이 타들어가겠으나 이로써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역사는 먼저 당신들의 의뢰와 헌신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주를 향한 온전한 신뢰로의 감사이다. 불의는 사람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에 두고 있어서 당장은 분간이 안 간다. 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즉 나는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 할 때의 이 명약관화한 사실 앞에 놀란다. 그땐 그랬다. 어느 한 사람도 주를 구주라 외치며 함께 붙들리지 않았다. 이는 결국 사람이 사람의 의지로는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한 데 의지할 수도 없다. 모두가 그러한가? 나는 나 같은 자가 가장 싫다. 뭐라 하다 저가 나와 같을 때 나는 치를 떤다. 그러니 나를 어찌할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도 드는 생각이나 그리하여 나를 값으로 사셨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 값은 오늘 내용과 같이 예수께서 수모를 당하시며 붙들렸고, 모두가 버리고 간 자리에서 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는 하나님이시나 사람으로서의 일이라,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4-36).”
사람으로의 일이라, 사람 예수는 같은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아뢰었으나 곧이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었다. 곧 우리의 재창조 곧 조성하심은 이와 같은 자리에까지 가 닿는다. 나는 원하나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살면서 무엇을 간절히 구할 때 사람이니 의당 누가 고통을 바라겠으며 괴로움을 달가워할까?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이 놀라운 값, 그 값으로 사신 바 된 나, 오늘의 나로 있기까지 전우주적인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야 했다. 내가 한 의인을 만나기 위해 저는 또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숱한 어려움과 고통을 지나왔다.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시간을 위해 서로의 우주는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며 새로이 조성되었다. 하나님의 처음 창조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것으로 끝이었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믿음으로 내가 주를 주라 시인하고, 믿는다고 믿는 것 같으나 그 모든 과정에서 수천수만 가지의 사소함이 일어났다 소멸되고, 소멸되었다가 다시 생성되기를 무한반복 하듯 되풀이 되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이 생성되었으니 이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하시는 말씀은 그 안에 내포하는 의미가 무한대에 가깝다.
나는 누구의 일을 이야기하다 문득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숱한 사연들이 뒤엉겨 ‘이 일’을 조성하고 있을 것이고, ‘이 일’은 궁극적으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 테니…. 함부로 뭐라 속단할 수 없다. 우리의 상식 따위로 접근해서도 안 될 일이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까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죽기까지 사랑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오늘의 나로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기까지 나 또한 숱한 사람과 사건과 상황들이 여러 개의 은하계와 우주의 셀 수도 없는 별들만큼이나 사소함이란 이름으로 명명되어 생성되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대상의 이름을 적고, 저와 얽힌 여러 사연을 나열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내가 선뜻 뭐라 정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두려워 입을 다문다.
주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시선을 놓치는 일은 사소하나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나는 그러다 잊고 있었다 해도 하나님은 때가 차면 어떤 계기와 우연을 동원하여 조성하신다. 이를 앎으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하나님께로 눈을 돌리지 못할 때는 사람에게 시선을 두어서다. 사람에게 끌림은 저의 표면적인 일에만 정신이 팔려서다. 당장의 아이 일로 아이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하여,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전날에 누구에게 얼결에 했던 말로 내내 마음이 어려웠다. 나는 무슨 수로 저 아이를 맡는다고 했을까? 나의 이러한 조바심과 복잡한 마음이 저로 기도하게 하고 있을까? 기도해보고 결정하라고는 했으나 선뜻 그렇게까지 나선 것은 내 안에 억눌린 어떤 감정, 아이와의 동일시한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고, 졸지에 나와 상관없던 우주가 내 위로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혹은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거나…. 좌우지간 이 또한 주가 하시려는 일일 테고, 그것이 어떠할까? 나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앎이란,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참 신기하지? 요즘은 하루 중 어떤 일과 아침의 묵상한 말씀과 저녁에 장모와 같이 예배드리며 읽는 말씀이 마치 누가 설교원고로 던져주는 것 같이 일치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는 것이고, 이것으로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며, 저가 오늘 본문에서 나의 값으로 잡혀가신 예수시면서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어쩌다 내가 저의 안에, 저가 내 안에 계실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알지 못하면서도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는 사실 앞에 두 손을 든다.
마음이 없으면 선도 이를 수 없다. 뜬금없기는 하였으나 ‘그럼 내가 아이를 가르칠게!’ 하는 조건은 조건 아닌 오랜 기다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벌써 작년 초였나? 아이를 좀 데려왔으며 하는 것을 나는 성가신 마음에 여러 핑계를 대고 거절하였다. 저들 부부의 일을 빌미로 ‘너희들이 문제다.’ 하는 이유로 관심을 돌렸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뭘 잘해서, 어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맡기시는 사명이었을 것을 안다. 거의 평생을 아이들을 대했고, 나는 실제 아이들이 순진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어른보다 영악하고 사악하기까지 하다. 그 속의 죄는 어른보다 무모하여서 자칫 휘말리면 눈에 들어간 먼지 같이 꺼끌거려서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다. 한 마디로 나는 언제부터 아이들이 싫다! 무섭고 징글맞다. 재판까지 간 동생의 일도 실은 아이의 단순한 거짓말이 부풀려져 여기까지 온 것이다.
더욱이 난 ‘나 같은 아이’일 것을 알아서 거절하였다. 요즘 집으로 오는 아이를 두고도 아내는 내가 같이 글쓰기를 하였으면 하지만 싫다. 정작 우리의 모순은 자기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다. 서로가 닮았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죄의 결과이기도 하다. 내남없이 너나 나나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 말씀은,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 11:41).” 내가 싫은, 나 같은, 그것으로 구제하라 하심인데, 어제는 문득 내가 받은 은혜가 컸음을 인정하면서 하물며 그러한데 내가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하는 자책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이를 좀 더 성숙한 어조로 바꾸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면 나는 진정 그러한가? 오늘 말씀의 정황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아, 이 일이 그러하였던 것인데, 오늘도 나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 다를 바 없고,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51-52).” 다를 바 없다.
마치 베드로와 같이 호언장담하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72).” 나도 운다. 나로 어찌 사랑하셨는가를 생각하다 내가 운다. 내가 뭐라도 된 줄 알고 하겠다, 말겠다,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1-2).
나로 오늘도 주 앞에 나아오게 하심이 귀한 일이어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하여 이를 놓고 기도할 따름이다. 앞으로 어찌하실지는 알 수 없어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온전히 알게 될 날이 다가오는 것을 믿음으로,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4).
이에 모든 것을 주께 맡기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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