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전봉석 2023. 12. 18. 05:17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막 16:19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 69:33-34

 

 

조금은 나아지길 원한다. 그 형편이 어떠하든지 점점 더 좋아지길 바라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로 절망하게 한다. 예수는 죽으셨고 죽은 자를 위하여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나마 무덤 또한 비었다. 빈 무덤, 우리에게 좌절을 더하는 그것이 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증거가 된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6).”

 

낫고자 하여 구하고 바라며 애쓰던 일이 빈 무덤과 같을 때, 우리에게는 좌절이나 말씀에서는 이에 소망이 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7).” 어려운 일로 주 앞에 엎드린다. 공연히 사람들의 말거리가 되고 조롱이 된다. 이에 오늘 시편에서는,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시 69:5-6).

 

행여 나의 어려움과 궁벽함으로 주를 바라는 이들이 수치를 당할까, 욕을 당할까 염려가 될 정도이다. 그래서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7).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다’는 것, 오늘의 나로 두시고 남들로 되레 믿는 자로서 제대로 된 구실도 못하고 변변한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가장 가까운 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8).

 

그럼에도,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9).

 

이러할 때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하는 가운데서도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다.’ 주변의 시선과 평가가 비방이라 해도 나는 이제 멈출 수가 없다. 하여,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30-31).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놀라운 상황이 펼쳐진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2).

 

곧 나의 곤고가 곤고한 자들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삼킴을 보고,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그러하면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오늘의 나로 어렵게 하는 것들, 그 빈 무덤이 실은 예수 부활의 증거가 된다. 하여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난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10).” 비록 저들은 선뜻 믿지 못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1).” 주가 하신다.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12-13).”

 

죽은 자를 위해 갔던 무덤이 비었고, 빈 무덤이 절망하게 하나 주가 사신 증거가 되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 된 것’으로 주의 뜻이 나타나심을 느낀다. 빈 무덤 같은 어떤 어려움이 그런 가운데서 주를 찾게 하고, 주를 찾는 나의 열성으로 곤고한 자들이 위로를 얻는다. 곧 우리는 비극이라 여기는 곳에서 희망을 본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곧 오늘의 이 구차하고 보잘것없는 나의 일상의 기록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한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가령 교회 장소를 옮기고 마음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금세 뭔가 나아질 거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문의도 하나 없고 아무런 징조도 없으니, 괜한 짓을 했나 싶은 것이다. 안락하고 편안했던 곳을 기억하며 그냥 있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하나님은 어떤 뜻이실까? 섣부른 나의 판단이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괴롭혔다. 주일헌금으로는 턱도 없고 후원하는 손길은 한정되어 순간 불안한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특유의 배짱 같은, 막무가내로 하나님께 떠넘기는 마음으로 ‘주가 알아서 하시겠지!’ 더는 아니면 그 또한 주께서 그만두게 하실 테고…. 이러한 나의 두 마음이 서로 갈등하는 동안, 이번 달 임대료는 이미 채워졌고 관리비가 얼마가 나올지 모르나 그것 또한 차고 넘쳤다!

 

누가 들으면 웃을,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신세에서 교회는 건재하고 주가 행하심을 알게 한다. 나는 어제 주일예배 때 이와 같은 사실을 고백하였다. 주가 하신다는 것, 나는 한 게 없는데 주가 이미 채우시고 차고 넘치게 부어주신다는 것. 그러는 동안 ‘아픈 아이’가 다시 거리낌 없이 드나들고, 누가 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다 큰 딸애의 속사정을 털어놓으며 기도를 부탁한다. 나의 연약함이 저들로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된다는 사실…. 자신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이 실은 부끄러운 게 아니고, 숨겨야 할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나의 변변찮음이 저들로 찬송이 되게 하는 일이었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잘난 줄 알고 스스로 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야 뭐라 이른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하여 바울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런 위치에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였구나!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1:30, 12:9).” 이 놀라운 은혜를 알겠다. 조금은 유치하고 비루한 발상이나 나는 그냥 한다. 혼자 두시면 혼자 있는다. 누가 저의 사연을 말할 때 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묻지 않는다. 주일에 오고 안 오고, 저가 예수를 믿고 안 믿고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 미룬다.

 

응석부리며 칭얼대는 아이처럼 대신 나는 주께 툴툴거린다. 사람 붙들고 그런저런 소리 해봐야, 아내가 제일 어렵고 가족들이 제일 한심하게 여긴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빈 무덤에서 비로소 부활의 소망을 믿는다. 하여 늘 오늘만, 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깨운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힌다. 어디가 아프다는 거, 어떤 일로 어렵다는 것, 그러한 게 나를 먼저 병들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럴 거 없다. 오늘은 안 아픈 이쪽이 있어서 됐다. 누가 어떤 이야기로 힘들어할 때 내 코가 석 자라 해도 그것으로 나는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주께 아뢴다.

 

그러할 때에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19).”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하셨다. 이제는 재림만이 남았다. 죽거나 까무러치거나, 주가 오실 일만 남았다. 그러므로 나의 하루는 늘 ‘여기까지’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고작 백 근이 넘을까 하는 몸둥이를 이끌고 주 앞으로 온다. 나의 무거움이 몸의 일이었겠나? 실상은 우리의 현실이 문제이겠나? 지혜는 묻는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 6:2).”

 

그러니 나는 점점 나의 주권을 주께 넘기며, 교회를 이루시는 이도… 저 한 영혼을 살리시는 일도… 나의 이 모자람도 모두가 주의 뜻이면 주의 뜻대로…. 그러할 때에,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11).

 

내가 하는 일이란 게 고작 무덤을 찾아가고 빈 무덤 앞에서 좌절하는 게 전부였는데, 그것으로 부활의 증거로 삼으시더니 뿔뿔이 흩어져 모두가 제 갈 길로 갔는가, 할 때에 부활의 주는 찾아가시고 저들에게 보이시며 승천하셨다. 하여 나는 자꾸 까먹을 때마다 말씀을 되새긴다. 어쩌지? 하고 염려가 앞서는 날에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단 6:22).” 나로 이 현장의 목격자로 증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으니,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1-32).”

 

주와 함께 산다는 일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다가도 한가하게 정원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일처럼 고요한 것이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곧 나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늘 또한 부족함이 없다. 오늘의 나로 여기 두심은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게 하심이면서 동시에 누군가 나로 주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으니… 나는 나의 이 사소한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그것은 내가 먼저 사랑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 그러므로 오늘도 주신 한 날을 사는 일, 맡기신 자리를 지키며,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일을 행할 때,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39:7).

 

이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11).

 

오직 이 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4-5).” 실은 주가 이루신다. 어디가 괜찮다 싶으면 또 어디가 아프고, 그래서 달려갔으나 빈 무덤 앞에서 나로 확신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고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69:30-31).

 

이로써,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