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 2:28-33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 71:17-18
우리가 주를 바라고 믿는다는 일은 ‘그럴 수 없는 중에’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하여 어떻게든 앙갚음을 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으나 이를 주께로만 아뢰는 일이다. 상대와 같이 대적하고 저들처럼 싸울 때는 그 끝이 난장판이 된다. 개처럼 서로 물고 뜯고 싸울 수는 없다. 요셉이 억울하여 스스로가 상대하지 않았고, 다윗은 번번이 사울을 피해 도망쳤다. 정작 이길 수 있을 때도 그러했다.
우리의 상대는 하나님이시다. 곧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3).” 같잖으나 그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0, 11).”
억울하고 속상하고 답답해도 그것을 하나님과 나의 일로 돌리면 우리 생의 ‘정복할 수 없는 지겨움’에 대하여 주 앞에서 풀린다. 그저 내버려둠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동생이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과만 상대하고 씨름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어찌 됐든 검찰 측은 3년을 구형했다. 재판이란 게 증거로 싸우는 일이라지만 증거란 게 또한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아무리 허술해도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 되는 세상에서 더욱이 ‘촉법소년법’이라는 극약처방이 선생들로 죽음으로 몰아놓고 교육제도를 파괴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이의 그렇다는 주장 하나가 그 어떤 증거보다 우위에 있었다. 법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나 같은 이가 봐도 아이의 영악함과 아이엄마의 악의적인 허위사실이 보이는데도 검찰은 증거를 운운하며 그리 형량을 구형했다. 그래놓고 서로가 눈치껏 집행유해정도로 선고할 것 같은데… 문제는 시달림이다.
악령의 역사가 아니면 말이 안 된다. 본래부터 필리핀으로 보낼 때도 아이가 문제가 있었고, 이를 본인이 감당할 수 없어서 떠맡겼던 것인데… 2년 반 동안 아이가 생활하던 모습은 말해 무엇하겠나? 오죽하니 현지 학교에서도 아이를 서로 받지 않으려고 그곳 교사들이 회의까지 하고 전학을 권유하였을 정도인데…. 그러자니 이러한 사실을 일일이 입증해야 하고, 그러려면 같이 개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개한테 물렸다고 같이 물 수도 없고, 문제는 이번 형사재판을 민사로 끌고 가서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인데, 저들 심사를 누가 말리겠나? 작정을 하고 그러자는데, 결국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나는 동생과 통화하고 달리 위로와 격려는 하지 않았다. 저 또한 이 일로 하나님과의 사투 가운데 담판을 벌일 일이어서,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면 한두 마디 거드는 말들이 오히려 피곤하다. 누군 모르나? 같이 죽자고 싸우자니 그게 또 목사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상대할 수도 없고, 이렇게 말하면 증거가 어떠니, 항소가 어떠니 저마다 거들며 얹는 말에 눌려 죽겠다. 그래서 모름지기 모든 드라마의 소재는 복수와 응징이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을까? 나야말로 가까이 지내던 선생에게 연락하고 저를 통해 언론이나 기자를 접촉하여 이러한 하소연을 공론화할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그러자니 구구절절 있었던 일은 물론 저들은 감당할 수 없는 주의 일, 사역의 영역에 대하여는 오히려 내가 변명하듯 구차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앓느니 죽는다는 말, 하나님과 상대하는 게 옳다.
동생에게도 긴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 일은 저와 하나님과의 일이라, 울고불고 지지고 볶고 싸우든지 하나님과 담판을 져야 한다. 그렇듯 우리에게는 시편의 세계가 살아나야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 9:13, 43:2).
어제도 시편의 세계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70:2-3, 5).
우리가 시편을 살자는 것은 사람을 상대하지 말자는 소리다. 세상을 상대하여 싸울 이유가 없다. 저들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로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미 7:3).” 이를 우리가 상대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슥 9:4).” 그렇다면 우린 세상이 아니라 정복자 되시는 주를 상대하는 것이 옳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10:12, 13:3, 17:6).
실은 몇몇 친구에게 이를 알리고 어떤 도움을 구할까 하다 저들의 말 같잖은 조언에 혀를 내두르며 그만두었다. 항소하고 맞고소하라는 이부터, 어디 인터넷 사이트에 ‘그런 억울함’을 올리는 데 올려 여론화하라는 둥 저들이 대응하라고 하는 방식은 하나같이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자니 저들 말마따나 너 죽고 나 죽기로 붙어야 하고, 이참에 오히려 민사를 먼저 걸어서 한몫 단단히 챙겨야 한다고까지 하는데… 도움이 안 되는 말로 더는 덕이 안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후에 무려 일곱 번이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며 기뻐하셨다(창 1:4, 10, 12, 18, 21, 25, 31). 그런데 가만히 보면 둘째 날에 하늘을 나누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없다. 이는 타락한 천사들이 공중에 권세 잡음으로 땅을 주관하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2).” 여기서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된 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의 농간 때문이다. 이를 하나님도 아신다. 하나님은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 땅’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면 상관없다. 하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7-28).”
저들 ‘공중의 권세 잡은 영들’을 그대로 두심은 그들도 악한 날을 위해 쓰시기 위함이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저들은 틈을 노린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그러므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하시고,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우리의 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 두 인물, 시므온과 안나를 눈 여겨 본다. 저들은 누구보다 구원을 바랐고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8-32).” 시므온은 나이 들어 더는 운신이 어려울 때도 주의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시므온에게는 성령이 ‘그 위에’ 계셨고(25), 오늘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시므온은 예수의 구속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기뻐하였고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러니 우리가 비록 ‘저들’로 인해 시달림을 당하고, 저가 호언장담하듯 ‘목사 무릎을 꿇리고 말겠다.’고 하는데 가소로울 따름이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32:11).
우리의 외침은 세상이 바라는 방식의 싸움으로가 아니다. 그럴 거였으면 구원자로 오셨다면서 그처럼 힘 한 번 못 써보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까? 우리의 승리는 이 땅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악한 영들이 아니다. 그럴 거였으면 하나님이 저들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로 그냥 두셨을까? 후에 이르러 베드로는 알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곧 우리는 현세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세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시므온은 이를 고백하며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 이는 그리스도를 보기까지 죽지 아니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6).” 이는 우리 모든 성도의 숙명이다. 택하심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자녀이면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로 산다. 조심스러우나 나는 이와 같은 경험을 선물로 받은 바 있다. 주 앞에 먼저 가기 전에 저는 글방 근처로 왔고, 우리는 50일을 만나면서 말씀을 나누었고, 저는 눈을 감으며 ‘주의 그리스도’를 보았고, 나는 목사 고시를 두 번째 떨어지고 이 길이 아닌가 하다 저로 인하여 ‘주의 그리스도’를 보았다.
또 한 인물은 안나인데, 저의 생은 기구하여 결혼 후 7년만에 과부가 되어 84세가 되기까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37).” 저 또한 현세가 아닌 내세를 위해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그토록 살았던가?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8).”
우리가 사는 게 현세의 삶으로 이 땅이 전부라면, 우리보다 한심하고 억울한 인생들도 없을 것이다. 남들 다 누리고, 잘들 사는 세상에서 뭐하는 짓인지 원… 더러는 하나님 앞에 나는 볼멘소리로 툴툴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고작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라 해봐야… 같잖아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5:1-2).”
오늘을 사는 일은 이 두 사이, 현세와 내세에 끼인 것 같아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그래서 오늘도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5-26).”
나는 동생의 눌린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위축된 상태로 몸은 아프고, 가난하고 힘이 없으나 그 영혼이 주의 강권하심으로 더욱 굳건하여질 것을 믿는다. 다만 사모와 그 자식들을 놓고 기도하다 마음이 어려워져 주 앞에 아뢸 때,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71:1-2).
주가 하라 하신 사역이지 않나? 주가 가라 하신 길이 아닌가? 그렇다면 책임지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4-5).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2, 14, 17-18).
그러할 때,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2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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