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눅 11:44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 80:3
아는 것은 행하는 데서 얻는다. 우리 곁에 두시는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두고 주 앞에 씨름할 수 있으면 복되다. 이는 우리 안의 주의 영이 일하심이다. 아이보다 아이엄마가 더 심하다는 말에 나는 친구에게 너희 곁에 둔 그이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고 물었다. 성경을 읽고 상고하거니와 이는 행함으로 얻는다. 무려 열 네 시간을 있다 돌아가는 사이 우리의 대화는 주를 향하였다. 저도 신기해 한 것이 오후 두 시께 가려다가 주저앉아 성경에 대해 묻고 듣기를 즐겨하였다. 간간이 저들 모녀의 상태와 이를 어찌할까? 하고 주 앞에 내어놓으면서 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길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 실은 딛고 서는 데가 무덤이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 나는 친구에게 큰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곳에서 무얼 배우고 어떤 유익을 얻는가? 하는 데서 너는 어떠한가? 하고 저의 대답을 되물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준다는 것, 이는 주께서 우리로 오늘 여기에 두시는 이유였다.
그러자 마치 ‘율법교사’와 같이 성경을 물으며 그 이해 안 되는 부분에서 자신을 납득시켜주길 바랐다. 마치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 그러자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 당장 그들 부부 곁에 저들 모녀가 그와 같이 상한 심령으로 힘에 겨워하는데 그저 머리로만 도우려는가? 하고 되묻자 친구는 어쩔 수 없는 이유들을 나열하였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47).”
우리가 같이 교회를 다니고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일은 저로 인하여서 내가 시달리는 것이다. 나의 영혼이 저의 고통을 이고 주 앞에 엎드리는 일이다. 그럴 줄 모르는 저를 위해 주께 구하는 것이다. 주께서 기도를 가르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2-4).
곧 우리로 오늘 여기에 두시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첫째 이유는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함이었다. 이는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그 지점에서 주의 사랑으로 주의 권능을 가지고 주의 마음으로 대할 때, “나라가 임하시오며” 주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심이다. 그것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그것으로 충분한, 우리 안에 이미 충만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를 살면서 삶 가운데서 일용할 양식으로 섭취하며 사는 것.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저들이 묶여 있는 어떤 사슬, 죄의 굴레로부터 저들을 끌어내려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라는 일, 하여 우리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고 주께 간구하는 것이다. 같이 있다 보면 우리가 빨려드는 것 같아, 하는 말에 나는 그만큼 네가 주도하지 못하고, 주도하지 못하는 것은 평소 저를 두고 주께 기도하기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일렀다.
우리의 대화는 끝날 때쯤 아쉬웠고 아쉬워서 이어지다보니 아침 여섯 시에 와서 저녁 여덟 시가 되어 돌아갔다. 마치 말씀에 허기진 사람처럼 성경에 대해 물었고, 나는 주의 영이 내 입에 넣어주시는 말로 답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설명하였다. 서로는 그러고 있는 서로의 모습에 놀라워했고, 돌아가는 시간에도 아쉬워하며 성경공부를 같이 했으면 한다는 말에 기도하며 얼마든지 시간을 내라고 일렀다.
우리의 일상은 살아내는 성경이다. 말씀은 읽으면서 이를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죽은 언어를 붙들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믿음의 삶은 말씀의 실천이다. 곧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이를 따라 우리가 행하는 데 있어 잘하고 못하고는 의미 없다. 우린 다만 행할 뿐이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그러할 때 서로는 서로에게 ‘너처럼 나도’ 하며 따라하게 되는 존재가 된다. 이때의 기도는 필수다. 하여,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주께 고하는 한 마디, 이는 내 삶이 응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를 가지고 씨름하는 일이다. 하여 우리 곁에 두신 한 영혼을 두고 내가 무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5).” 구할 때 주가 행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저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벌써 주의 영은 일하신다. 우린 저들 모녀와 어떻게 하여야 접촉점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이를 두고 서로 화상으로 만나 대화하기로 하였다.
서로 거리가 멀어서 자주 왕래를 할 수 없으나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곧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가장 든든한 배경이 있다. 모두 다 아신다. 심지어 우리의 실수와 잘못도 이미 아신다. 그럼에도 주가 우리 곁에 두시는 영혼이라면, 오죽하니 우리에게 맡기셨을까? 하는 마음으로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우린 당연히 할 수 없으나 단 하나,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담대히 나가 아뢸 수 있는 주가 계시다.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시 124:1-2, 6).
우린 승리한다. 이길 싸움이다. 성가시고 두렵고 행여 긁어 부스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수시로 우리 안에 밀어 넣는 이가 동시에 우리 안에 있다. 염려와 근심으로는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우리의 삶이란 주를 의지하는 일이다. 성경을 읽는 삶으로 살아서 내가 예수가 되는 일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되고 모세도 된다. 바울이 되고 베드로도 된다. 저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되는 순간에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높인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
일용할 양식은 또한 매순간 부대끼는 시험이 된다. 한 사람을 품고 산다는 일, 저의 영혼으로 내가 주 앞에 시달리는 것이어서 그러는 동안 우리 영혼은 주를 더욱 바라게 된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8).” 주가 그리 행하실 것을 앎으로 또한 주 앞에 나아간다.
곧 우리 곁의 어려워하는 영혼을 두고 기도할 때 내 안의 노여움을 용서하는 일이 된다. 늘 그렇듯 싫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닮은 데가 많다. 한참 뭐라 욕하다보면 그게 나 자신인 것을 자신은 안다. 가령 자식을 훈계하고 야단치며 뭐라 이르다가 보면 그게 다 내가 들어야 할 소리란 것에서 놀란다. 그러므로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그러므로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은 자신과의 화해다. 가령 친구는 일체 자기 것을 내어주기 어려워한다. 낚싯대가 광에 갇혀 썩어가는 데도 누구에게 줄줄 모른다. 스스로도 인정하는 일이다. 가진 것에 대한 소유욕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자신이 애써 수고하여 얻은 것들을 돌보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요구하고 강요할 수 없다는 논리다. 자유의지까지 운운해가며 자신을 두둔하려 드는 친구에게 스스로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사는 게 너무 많다! 하고 일갈했다. 그러면서도 주를 따르고자 하나 재물이 많은 청년이 결국은 모든 것을 나눠주고 따르라, 하실 때 고민하며 돌아갔던 것과 같다. 저는 그래서 다시 돌아왔을까? 결국은 그러지 못하고 옛 생활로 돌아갔을까?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우리에겐 이와 같은 확실한 보장이 있다.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1).
하나님은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응답하신다. 행여 내 뜻과 다르고, 구하였던 것과 거리가 먼 것 같으나 ‘더 좋은 것으로’ 그리 행하심을 믿은 결과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강한 능력이 있다. 이는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2-23).”
주가 일하실 때 동시에 주가 나를 보호하신다. 하여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2-13).” 그러므로 우린 주만 믿고 한다. 하려 하나 안 되는 일에 대하여는 주께 맡긴다. 때가 되면 주가 이루실 것이다.
친구는 무슨 말 끝에 조심스럽게, 실은 그 엄마가 조현병인 것 같아! 하고 자신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그 어떤 정신질환보다 오히려 관리가 잘 되고 약물 효과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아픈 아이’가 변한 것을 마침 친구로 볼 수 있게 하셨는데,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친구가 와서 다음 날로 미루었는데 녀석은 뜬금없이 새해 선물로 모자를 샀다며 잠시 들렀다 가겠다고 고집하였다. 나는 친구의 양해를 구하고, 우린 같이 점심을 먹었다. 녀석은 곧 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며 선물만 주고 가려는 걸 같이 갔던 것이다. 전혀 모르겠는데? 하고 친구는 놀랐고,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 달라진 모습에 대해 설명하며 그 비결의 두 가지, 하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주 앞에 정직해지는 것. 하나는 하루에 한 장씩 아이는 성경을 필사하고 이를 지키며 산다는 것. 마치 우리 육신을 위하여 약을 복용하듯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말씀이 된다는 사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80:3).
우린 주께 구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4).
우린 주와 씨름한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4).
우린 주께 요구한다.
그러할 때,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7-18).
이와 같은 담대함으로 믿고 달려가는 것,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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