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6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여러 군상이 운집하여 살아가는 것 같으나 실상은 개별적이고 개체적이다. 같은 가족끼리도 저마다의 속내를 다 알지 못한다. 이에 우리를 상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곧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살고, 이를 알려 땅 끝까지 증인이 된다. 이때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능력과 권세다.
오늘 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그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다. 이때 맡은 자의 구할 것은 하나이다. 이를 위해 스스로 무엇을 도모하고 준비하지 않는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3-4).” 우리 이해와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된다. 은연중에 교회에서도 준비된 자를 쓰신다며 세상적은 논리로 이를 본다. 그런데 성경의 어느 인물이 준비하고 감당하였던가?
노아가 방주 지을 준비가 된 자였었나? 아브라함은 그 먼 길을 떠날 각오가 되었던 사람이었던가?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숨어들어 40년을 낙오자로 살았을 뿐 저가 언제 지도자 수업을 받았던가? 우리 교육의 허점은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세상 논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가 취할 것은 주의 능력과 권세뿐이다. 여행을 위해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니? 그것도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5).” 우리로서는 실패가 없다. 실패나 손해는 내 몫이 아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 이문을 남겼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의 이문을 남겼다. 손해를 보지 않은 것처럼 그 이상의 것도 이루지 않았다.
가진 것도 없이 베드로가 말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내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 누구는 결국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홈스쿨링을 감행할 모양이다. 나는 아이의 사회성을 위해서도, 그 부모의 자질과 저 본인의 감당하지 못할 일을 두고 뭐라 염려하고 충고하다 더는 나설 수 없는 어떤 벽 앞에서 길을 잃었다. 뭐라 하면, 잘 모르겠어요! 하는 식으로 답을 할 뿐이니, 본인들은 물론 아이를 위해서도 그러지 말라고 이르다가 그만두었다. 이상하면서도 모두가 같은 것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 경우’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누구는 일반 아이들보다 지능이 낮고 장애 판정을 받아야 할 정도인데도 어떻게든지 학교에서 아이가 아이들과 어울리며 부대끼며 자기 생을 살아남기를 바라는데… 무슨 배짱으로 자신들이 책임지겠다고 저러는 것일까? 우리는 말과 삶에 있어 우리 지혜로 하는 게 아니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말씀, 고로 전적으로 주께 맡기며 ‘나는 나, 너는 너’로 각자의 개별적인 하나님과의 씨름이 필요할 터인데….
고등학생인데 지능이 떨어져 아무 것도 못하는 아이가 있다. 이미 나이가 들어 장애인학교에 보내 그에 맞는 기술을 배우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데 아이엄마는 또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아이의 늦됨이 자신의 잘못이라 여겨 심한 우울증을 겪는 쪽은 아이엄마다. 그러니 설상가상이라고 아이를 어찌할까 하다가도 아이엄마가 문제인 거라, 스스로 끼고 돌아서 어쩌자는 것인지… 집이 멀어 여기까지 오고가기 힘들어서 우선은 글을 쓰고 그것을 카페에 올려 자기 방에 적어보면 어떨까 하고. 필요할 때 통화를 하거나 화상으로 수업을 하며 첨삭을 하고 대화를 하는 것으로… 여러 궁리를 하면서도 정작 문제는 아이의 엄마여서 이를 어찌 해야 할까, 하고 친구는 어려운 마음을 풀어놓았다.
난들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겠나? 다만 나는 가진 것이 없으나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그렇게든지 저렇게든지 접촉점을 찾아 해보는 수밖에. 이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우리로 순종하게 하려 하심인데, 순종이란 내가 어쩔 수 없는데도 예수 이름으로 그리 행함이었다.
아내는 새로 시작한 지능이 좀 부족한 아이가 강박증까지 앓고 있다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물었다. 내가 아는 한 강박은 참으로 까다롭고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일이다. 우선은 그냥 두고 그 영역을 존중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이를 고치거나 흩을 수는 없다. 좀 더 지켜보면 그 안에도 길이 있다. 벽이라고 느꼈던 곳에 문이 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봐주고 기다려줘야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기도뿐이고, 나아가 적당한 지식도 필요하다. 우리 곁에 이와 같이 상한 영혼의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오늘 본문의 첫 어절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1).” 즉 우리로 감당하게 하시려면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도 주신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나서서 다른 여러 궁리를 찾는 데 있다. ‘아픈 아이’가 오전근무를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왔다. 같이 걷다 나름은 심각한 어조로 요즘 고민(?)을 말하였다. 아이와의 대화는 그 의중을 읽어야 한다. 문맥과 일반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고민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곧 신년이라 떨어져 사는 아버지와 친가 식구들을 만나러 서울에 가야 한다. 혼자 갈 수 없어 형이 같이 동행을 하거나 아버지가 데려가고 데려오는데, 그래야 하는 자기 신세가 답답하고, 띄엄띄엄 오는 저들 가족을 다 만나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였다. 그렇다고 먼저 돌아오자니 스물다섯인데도 길을 찾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다. 자기도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인데….
점심 먹고 같이 올라와 그 이야기가 연장되면서 아이는 심각했고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니 누굴 사귀어도 걱정, 행여 서로 좋아서 결혼까지 생각 한다 그래도 걱정인데, 점점 나이는 들고 욕구는 차고, 그럴 수 없는 자기 처지를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끝이 없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나는 자주 할 말을 잃고 허공을 멀뚱거렸다.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었다고 하셨으니,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권세를 주실 것을 바라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차원에서 듣고 답하고 주께 돌린다. 주님, 하고 부르며 우리 곁에 두시는 이런저런 이의 무거운 짐을 대신 내려놓는다.
그러니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내가 하려고 하면 답이 안 나온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제안을 하고 이에 응하면 주께서 다음 행보를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뭐 하나 자신이 없다. 하다못해 나름은 가장 만만하다고 할 수 있는 신대원 동기와 그들 아이에 대한 문제는 허심탄회하게 주의 뜻 안에서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신기하기도 하지? 가장 말을 듣지 않는다. 자기들 옳은 대로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지난 주 고민을 여전히 안고 있는데 그 문제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같은 거였다. 결국은 아는 게 병이라고, 동기이면서 또한 목회자들이라 보다 쉽게 뜻을 같이 할 거 같았는데, 웬걸? 더 어렵다.
보면 늘 안 믿는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이 오히려 강하다. 그럼 우린 우리의 약함으로 주를 더욱 신뢰하든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뭐라 이르면 아는 건 많고… 대화하다 내가 엉엉 울어버리고 싶을 정도이다. 아,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6).” 여기서 두 가지,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복종’이다. 복종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모두가 동일하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결국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권세일 텐데, 상대적으로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이를 보면서도 저들의 논리에 따라 살겠다고 고집이면, 더욱이 믿는 자라는 사람들은 대책이 없다! 오히려 안 믿는 이들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하고 받아들이기라도 하는데…. 서너 개의 엇비슷한 경우가 하루에 뒤섞였던 날이었다. 나는 나의 ‘아픈 아이’의 심각할 게 없는 그러나 심각한 고민을 두고 마음 아팠다. 동기 사역자 내외의 여전한 갈등으로 짜증이 났고, 메일이나 전화, 화상으로 소통이 가능할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딪쳐봐야 할 일이고, 집으로 오는 아이의 강박적인 행동에까지는 아직은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이 모든 화근과 문제해결의 비법은 회개뿐인 것을 안다. 하나님과의 씨름, 용서를 구하면서도 긍휼을 바라는 치열한 사투가 답이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과 씨름하길 원하신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겔 18:21).” 이는 엄연한 약속의 말씀이다. 하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시 34:18, 22).
고로 우리의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믿는 자는 회개와 동시에 복종의 자리로 나아가고, 믿지 않는 자로서는 이와 같은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여러 군상들… 헤롯은 예수를 자신이 죽인 요한인가 하고 착란을 일으켰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하고 그러니 헤롯은 더 헷갈려하면서도 예수를 보고자 했다(9). 어떤 이들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를 남길 정도로 희한한 경험을 했고(17),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고 고백했다(20). 그런데 예수께서는 일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시며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3-24).”
곧 오늘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일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고자 하는지 얻고자 하는지 되묻게 된다. 나는 천하에 게으른 사람이라 일을 찾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한데 이런 일들(?)이 터지면 과잉감정이입으로 기도하게 된다. 나는 변화산에서와 같이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고 ‘이대로’를 선호한다(33). 그런데 주님은 끌고 가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난장의 일상에 떠밀어 넣으신다(42).
그럴 때 나는 당혹스러워하기 마련인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하실 때 난감하나 복종한다(48). 아, 주님은 때로 당황스럽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그럼 무엇으로 대비하여야 할까? 하고 있을 때 오늘 시편의 답변은,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78:1).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하여,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7, 32-33).
길이 있는데 다른 길을 돌아 먼 길로 가겠다면야 어쩌겠나? 굳이 광야 40년의 길이 아니었어도 되었을 것을. 나는 나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두고는 오래 씨름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리하여서 지금 맡기시는 일이면 강담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실 것을 간구한다. 답답한 길은 결국 가보고 나서야 그곳이 막다른 길이었음을 알 때인데,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흘러 어느새 소년이 청년이 되고, 청년이었던 이가 노인이 되어서 더는 길이 하나뿐일 때의 난감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35).
결국 죽어야 살고, 맞아야 정신이 드는 일이어서, 별 수 없는 일은 어떻게 한다 해도 별 수 없는 일이어서 터지고 구르고 망가져서야 비로소 아는 것이라면,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7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0) | 2023.12.29 |
---|---|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0) | 2023.12.28 |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0) | 2023.12.26 |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0) | 2023.12.25 |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0) | 2023.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