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눅 10:7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 79:13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는 두려워한다. 단 하루 혹은 몇 시간 전으로만 되돌릴 수 있어도, 더는 용서도 자비도 구할 수 없는 지점을 생각하면 나는 오금이 저려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으로 평소에도 <나의 아저씨>를 자주 돌려보곤 하였다. 나는 저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앞에 아쉬움과 두려움으로 우리의 우매함을 탄식하였다.
우리로 이 땅을 살게 하심은 한 생을 다하는 동안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어쩔 수 없는 지경’에서도 주를 신뢰할 때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신다. 이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여 모든 피조물은 주신 생을 다하는 동안 삶으로 살아서 그 생을 다하기까지 주를 바란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이를 살아서 사는 동안에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 나는 항상 누구의 그러한 죽음 앞에서 아찔하다. 우리 안에 주의 영이 계시지 않다면, 그렇다면 그보다 더 좋은 수는 없을 것이다. 철학자 아무개를 들먹일 것도 없이 우리의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최선이어서, 나는 한동안 그와 같은 충동을 자주 느끼며 살기도 하여 조금은 안다.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듯 사탄은 틈을 노린다. 하나님은 누구의 죽음도 원치 않으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어떤 이유였는지, 우울증이었는지 수치심이었는지 더는 중요할 게 없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건너면 그 너머로 갈 때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그렇게 어제는 자주 시선을 놓쳤고 나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아찔하였던 순간마다 주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하는 감사와 찬송이 마음을 뜨겁게 하였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을 작사한 윌리엄 쿠퍼는 고질적으로 닥쳐오는 우울감으로 시달렸다. 저는 타락한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존재론적 위기 앞에서 예수의 십자가로 자신의 감정을 불태웠다. 칼빈의 5대 교리인 은혜의 교리를 기초로 하여, 우리의 전적 부패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 실제가 자살이다. 누구에게는 이를 허용하나 누구에게는 이를 결코 허용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성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자 예수님의 제한적 속죄를 강조하면서 ‘나 같은 죄인’을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성령 하나님의 불가항적인 은혜를 덧입힌다. 나는 누구보다 그와 같은 심정(?)에 과장되게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한편으로는 어떤 이의 죽음을 항상 부러워하는 것이 예전의 이유와 오늘의 이유가 다르다. 지금은 내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으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전 7:3).” 하는 말씀 앞에 전적으로 붙들린다. 하여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돌아오는 주일 설교원고 본문이기도 하고, 이번 한 주간 붙들고 섰는 말씀이기도 한데 뜬금없이 누구의 죽음을 뉴스로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주는 우리로 관망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세우셨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해서 70인을 각각의 고을로 보내시며 주를 전하게 하셨다. 이에 전도서의 충언을 한 마디 더 얹자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곧 일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처럼 말씀 앞에 앉는 일, 누구 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행여 주가 맡기시면 할 수 있는 바 나를 움직여 그 일을 수행하는 것. 그럼에도 부질없는 것 같아,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11-12).” 그러나 이 끝도 없는, 하나마나 한 일 같은, 성과도 없고 가시적인 변화도 없이 그저 스쳐가는 바람 같았다 해도 우리는 그 순간에 충성하는 것뿐이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흩어지고 만다 해도, 심지어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8).” 나는 이것이 싫어서도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했었다. 나의 부친은 번번이 실패였고, 그 끝이 허무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끝까지 같이 할 것 같던 사람들은 쓸려 다니는 안개 같았고, 남들은 잘도 이루어 건물이며 사람이며 번듯하니 세워 부흥을 했네, 능력의 종이네 하는 평가를 듣는데. 늘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아서… 이제와 면목은 없으나 그때는 하나님이 싫었다. 사람의 모든 최후는 별로여서 노아도 아브라함도 별로 부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예수보다 실패자가 또 있을까? 모두가 예수를 버렸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니 저는 일개 몽상가의 허튼 바람이지 않었던가?
그래서 나 역시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전 6:4-5).” 차라리 나지 아니한 자를 부러워하곤 했다. 누가 저리 죽었다 하면 한편으로는 이제 비로소 놓여났는가? 하고 저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한데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 말도 안 되는 진리로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인데….
어제는 막내 동생이 새로 부임하게 되는 교회와 그곳에서의 역할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에 따른 어려움이나 마음의 소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고 산다는 데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제 개척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을 뻗어가며 주의 일을 도모하는 것에서… 비록 인간적으로는 속상하고 답답한 일이기는 하나 둘째 동생이 겪고 있는 오늘의 시련으로 나는 우리 형제들의 고단한 삶이 복되고 감사하였다. 곧 우리가 시달리고 핍박을 당하는 일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이와 같은 말씀으로 산다. 이 말씀을 알기 전까지 나는 늘 자살을 지갑 안쪽에 숨기고 있는 비상금으로 여기며 살았다. 아이들도 이만큼 컸고, 아내도 적당히 슬퍼하다 잘 살 것 같을 때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나의 고단한 육신을 또는 마음에서 이제 그만 놓여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제 이를 실행으로 옮기려 할 때면 그때는 몰랐는데 주의 강권하심이 나를 불가항력적으로 붙드심으로 살았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나는 이미 여러 번 죽었다. 한데 ‘은혜가 크면 책임도 크다.’
어릴 적 나의 부친은 어린 내게 왜 그런 소릴 했을까? 하나님은 너를 특별히 사랑하신 거야! 하는 말이 한동안은 그 어떤 저주보다 싫었는데, 이제는 이로써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한다는 바울의 주장에 크게 공감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누가 나의 하루를 관찰한다면 얼마나 치열한지 알 것이다. 하다못해 지금 책상에 앉아 묵상글을 쓰는 이 평안한 시간일 것 같은 때도 나의 한 팔은 무리하여 자꾸 오타를 내고, 엉덩이는 아프고, 허리는 통증이 가시지 않고, 나의 두 다리는 저리고 시리다.
이런 소릴 하는 것은 아플 때 더욱 주를 바란다.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고, 마음이 가는 곳에 상한 영혼의 누가 있다. 어떤 이의 남모르는 사연이 가슴 아프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나는 저의 이름을 두고 주께 아뢴다. 은혜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받을 자격이 안 되는 나를 주가 사랑하셨음을 아는 것에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를 바란다.’ 바랄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이는 그 어떤 능력보다 위대하다.
그리고 친히 예수께서 염려하시며,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 오늘 본문은 그리하여 이율배반적이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4-5).” 이는 모든 것을 주가 책임지신다는 말씀인데,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6).” 하고,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7).” 나는 교회를 지키면서 이 놀라운 은혜를 매순간 체험한다. 교인 수나 들어오는 헌금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그런데 늘 보면 밀린 적 없고 늦은 적도 없다. 부족한 게 없고 누가 오면 베풀 수도 있다.
오늘은 친구가 연차를 내고 하루를 온다. 서울에서도 반대편 쪽이라 길이 막히면 한도 없어 아침 일찍, 여섯 시쯤에 온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이런저런 안부와 함께 서로가 밀렸던 이야기-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지를 나누게 될 거였다. 이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라, 굳이 그럴 게 뭐 있나 싶은데 서로가 이와 같은 만남을 손꼽아 기다렸다. 희한하지?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8-9).” 이제 우리는 그러하다. 전에는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10-11).” 서로가 피하고 말도 꺼내기 싫었던 것을 두고, 우린 이제 즐거이 나누며 주를 찬송한다.
우리가 주를 영접하고 산다는 일은 70인으로 보내심을 받는 일이다. 성경에서 7은 완전수로 10을 곱하여 모든 믿는 자를 뜻한다. 목사여서 또는 어느 특정한 직업인으로가 아니라, 우리는 어딜 가나 주를 나타내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그러니 만일 여기가 교회가 아니면, 내가 주의 종이 아니면 굳이 ‘그런 일, 그런 사람’을 두고 씨름할 게 무엇이겠나? 잘난 체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는 누구든지 글을 쓴다고만 하면 3개월 안에 저로 상 받게 할 수 있다. 어디 뽑혀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사연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갖는다. 소재 싸움에서 조금만 다듬고 표현을 더하면 누구라도 공모전에서 입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영혼을 두고 같이 씨름하기를 원한다. 그저 특별한 소재가 아니라 주의 은혜로 그의 책임을 알게 하려 한다.
거기서 서로 부대끼는 것 같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분명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19).” 이 놀라운 능력을 더하셨다. 그러자니 서로가 싸울 이는 자신이었다. 자신을 붙들고 있는 악한 영이었다. 이를 저는 선이라 여겨 지나치게 완고하다. 또는 어떤 자책을 악이라 하여 이를 저는 지나치게 악하다 한다. 그러함에 있어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다만 우리의 자랑은 주를 경외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시 79:4-5).
그 누가 우릴 알아줄까? 내 안에 이는 여러 생각으로 나는 시달린다. 누구의 죽음 앞에서 나는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이는,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6).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다. 누구에 대해 선뜻 내가 나서지 않는 것도 주의 뜻이면 주가 이루시고 함께 하게 하실 것을 안다. 내가 나서서 어찌 해결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을 두고는,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8).
주께 구한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9).
모두가 죄인으로 살면서 나로 주의 길을 사모하게 하심은,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1).
저를 중보하게 하려하심이다. 하여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하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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