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전봉석 2023. 12. 31. 05:06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4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 82:6-7

 

 

우리의 급선무는 구원이다. 구원은 단번의 역사이면서 매순간에 필요하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구원은 수시로 일어난다. 미처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가령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다. 즉 저들이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죽임을 당했다는 소리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비극적이고 난데없는 사건이기는 하다. 이에 대해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리고 이르시길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신다(2, 3).

 

또 한 번은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었다. 이 또한 끔찍하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이에 이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런 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고 단정하셨다(4, 5). 곧 우리가 사는 동안 뜻하지 않은 일을 목격하거나 경험하기도 한다. 은연중에 저들이 무슨 죄로 저런 일을 당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고 한다. 또한 어찌 저런 끔찍하고 비극적인 일이 자행되도록 하나님은 그저 내버려두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오늘 날 가자지구를 공급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나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러시아를 보면서도….

 

누구의 어떤 상황을 두고 마치 자신은 예외인 일인 것처럼 여길 때,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시는 경고다. 그러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4).” 하시는 주님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구원은 단회적으로 이루어져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얻는다. 그러한 뒤 우리는 사는 동안에 수시로 구원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은 그만큼 주를 신뢰하고 의지할 때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를 인정하고 의뢰한다는 일은 단지 이 땅에서의 어떤 불행을 모면하는 그 이상의 일이다. 이는 천국을 확장하는 것으로,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19).” 보잘것없는 겨자씨 한 알 정도의 믿음인 줄 알았는데, 그와 같은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

 

전혀 다른 형국의 세상을 맞이하는 일이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20-21).”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확장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는 이를 가끔은 친구에게서 본다.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고 내가 알고 있던 친구와 다른 모습을 접할 때 낯설다. 이와 같은 낯선 기쁨이 저를 축복하고 나의 기쁨을 복되게 한다. ‘아픈 아이’의 달라진 모습이나 어떤 이의 새로운 삶이… 저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같이 누릴 때,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0-11).”

 

우리가 무엇을 보고 또는 어떤 일을 겪으면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고백으로 오직 주만 의뢰하게 될 때를 본다. 그 어떤 엄청난 보상과 억만금의 재물을 준다 해도 다시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의지는 내 것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때 혹은 남북전쟁을 겪으면서, 예수를 한 번 부정함으로 살 수 있는 기회 앞에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무명의 선조들을 생각한다. 신사참배 하나로, 주일성수 하나로 기꺼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었던, 구원의 역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두려운 마음에 순교라는 표현을 함부로 쓸 수 없겠지만 어찌 사도들을 위시하여 숱한 사람들이 그처럼 순교를 당하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는지….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4-7).”

 

오늘에 이르러 성경의 역사는 우리 이야기다. 당장의 내 이야기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다. 그리하여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오늘 우리의 여러 상황은 교훈이다. 훈계이며 경고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가자지구의 엄청난 살상이 오늘을 안이하게 살고 있는 우리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다.

 

이에,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3, 24절의 한 장면을 머리에 새긴다. 구원은 모두를 위하나 ‘모두’는 ‘아무나’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심을 이상히 여기지 않는다. 곧 이르러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심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마치 노아의 구원의 방주에 탄 사람은 그의 가족뿐이었다. 무려 120년을 참고 또 기다리시며 모두가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기를 바라셨으나… 앞서 이 날의 경고를 알리는 므두셀라는 모든 인류를 통틀어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 969세에 죽었다. 저가 죽던 날,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고 홍수가 일어났다. 저를 낳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저의 이야기를 들었을 노아는 묵묵히 방주를 준비하였다.

 

한 사건, 어느 인물로 인하여 우리는 깨닫는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이와 같은 말씀을 경고로 듣고 두려움으로 삼을 때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 그 속을 주도한다. 하여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하면 나의 가지에는 어떤 열매가 맺어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두려움이 일어 자신을 주 앞에 바로 세울 때, ‘에녹의 동행’이나 ‘노아의 순종’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우린 너무 안이하게 이를 듣는 게 아닐까? 고작 주일 하루 정도, 주 앞에 드리는 예배나 헌물에 대해서도 너무 가벼이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긴다. 그러면서 어디에서 누가 당한 일, 망대가 무너져 여러 명이 죽었다는… 또는 누가 예배 중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는… 마치 남 얘기 하듯 말할 때 더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없어진다. 그저 찔끔 끔찍하게 여기다가 혹은 비극적이라며 혀를 끌끌 차다마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은 날에 ‘그게 바로 너였다!’ 하고 우리를 엄습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사 57:11-12).”

 

이와 같은 말씀이 두렵기는 한지?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인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그런 가운데 여러 군상이 있으나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14).” 오늘 본문의 회당장과 같이 그저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이와 같은 지적과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무리들 또한 수두룩하다. 아,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하실 때,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7, 8-9).” 하시며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성령도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주께 고하신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1).

 

이 기쁨은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지었다. 엊그제 친구가 와서 하루 종일 성경을 더 알고자 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어찌할꼬?’ 할 때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가 주 앞에서 함께 하였던 시간이 놀라운 이유다. 오히려 ‘아픈 아이’라 하여 우리가 마치 저보다 낫다고 여기는 그이가 교회를 사모하고 말씀으로 새 힘을 얻을 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누구의 지능이 어떠네, 저들이 어떤 일을 겪으면서 지금의 그러한 지경에 놓였네, 할 때에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히 주 앞에 감사의 영광과 찬송이 드려져야 한다.

 

설마, 하는 날에 홀연히 주가 거두실 수 있다. 그때를 우리는 알 수 없으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 24:40).” 설마, 나는 아니지요? 할 때에,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1).” 그게 나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사는 이에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 이와 같은 말씀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더하신 것은 듣고 깨달아 두려운 줄을 앎으로 우리는 주를 바란다. 하여,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믿음이 없는 이들이야 그럴 수 있겠다지만 믿는다는 자가 ‘해너미’를 보고, ‘해맞이’를 하러 주일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들과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등골이 오싹하다. 저는 언제까지나 주의 긍휼하심이 참고 또 기다리실 줄 아는가본데, 혹여 그날이 오늘 그 자리에서일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이를 때에 그야말로 더는 돌이킬 수 없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소용이 없을 텐데….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10:14).

 

하여,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118:5).

 

부디 오늘의 어려움이 혹은 두려운 경고가 크게 울려 멈추시기를. 멈추어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으시기를. 구원은 날마다의 것으로 우리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82:2).

 

부디 정신 차리시길.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5).

 

하나,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6-7).

 

존귀하나 존귀한 줄 모르고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