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 16:16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 85:13
모든 것을 알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를 세운다. 작은 데 충성할 때 큰 일을 맡기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하루가 바삐 지나가는데 이를 어찌 붙들 수 있을까? 세례요한의 때로 율법으로가 아닌 복음으로 천국은 확장된다. 더 넓히며 그리로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복을 아는 자였다. 그렇듯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2-4).
앞서 모든 걸 아시는 주께서 오늘을 허락하심은 이로써 내가 주를 인정하며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다들 사는 데 정신이 팔려서 정작 죽음 너머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하나 이 모든 것은 잠시 맡은 것으로 우리의 삶은 청지기다. 나는 특히 오늘 본문을 읽을 때면 저의 허비함이나 악한 행동이 오히려 주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 의아하다. 곧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 할 때,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5-6).” 하는 저의 일처리를 이해한다.
가령 나는 이맘 때 기부금영수증을 작성할 때 보통 저들이 쓴 것의 배를 적어서 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마음과 기도를 값으로 포함하여 환산하는 셈이다. 마치 내 이야기 같아서 나는 늘 주인의 것을 허비하여 손해를 끼치는 자 같은데 주인은 나의 일처리를 지혜롭게 여기신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 곧 우리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소유는 우리가 환산할 수 없이 무궁하다. 이를 가지고 마치 내가 선심을 쓰듯 하는 것은 그럼에도 주인의 것은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로써 나의 게으름은 충원된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 20:4).” 먹고 하는 일도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 같으나 우선은 내 자리를 지키는 것, 누구의 어떤 사연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말씀을 준비하고 이로써 주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일… 가끔은 너무 한량 같아서 송구할 정도이나 그리하여 맡기신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청지기는 맡은 바 그것을 지킨다.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고 내어주어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한다. 잊을만하면 연락하는 한 아이가 있다. 늘 저와 만나거나 통화를 하면 나도 모르게 ‘꼰대’가 된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공부를 하거나 뭔가 기술을 익혔으면 하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럼 녀석은 네에, 하고 그러려니 듣고 만다. 어느새 아이도 서른이 되었다. 이런저런 여파로 청소년 시절을 어찌 보냈는지 아는 터라, 그렇기로서니 여전하다면 어쩌려는 것인지. 주일을 지키자, 글을 써라, 기술이라도 배워라 하며 언제까지 임시로 하는 일용직으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학창시절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우리의 어려움, 위기는 오히려 선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오늘 청지기 비유에서 나는 저가 주인의 뜻을 바로 알고 그리 행하는 것에 놀란다. 곧 우리의 주인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모든 것의 소유주시라 그렇듯 저들로 후히 주고 탕감하는 일을 기뻐하신다. 곧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러므로 내가 누구 일에 과몰입을 하거나 과잉감정이입으로 힘들 때, 더하여 그것으로 기도하게 되는 일이 복되다. 가령 상담을 할 때는 최대한 거리두기를 하고 냉정하며 감정에 같이 휘둘려서는 안 된다. 정신과 의사가 한 말이다. 일일이 환자의 일에 감정이 전이되면 스스로가 못 견딜 것이라 하였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으나 이는 세상의 논리로 그런 것이고, 누구 일로 벌어져 있으면 저로 인해 기도가 나오겠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마음으로 기도가 되겠나? 어떤 이의 사연에 눈물이 돌고 가슴이 답답하여 주의 이름을 대신 부르는 일, 어쩌면 우리가 주의 사랑의 빛으로 밝힌다는 것은 그에 따른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하여,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4:10-12).”
나의 하나님이신 주께로 우리로 함께 하게 하심은 세상의 것으로 생명을 얻는 일에 사용하기를 바라심이다. 오늘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믿음으로 가는 천국이나 그 걸음은 각자의 발길을 따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었다고 하시는 데는 그 때문이다. 믿음은 관념이나 개념의 영역이 아니다. 실제로 나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누구로 인하여 차고 넘칠 때 주 앞에 저를 고하여 아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의 일이란 그러하여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으나 모든 일을 맡은 셈이다. 그러므로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 11:41).”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처럼 주인의 뜻을 따르는 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2-15).“
자칫 내 것으로 내가 하는 것처럼 할 때 그 속이 불편해진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서운한 감정부터 올라오고 괜한 심정으로 볼멘소리도 난다. 저를 비판하고 비난하게 되는 일도 그래서이다. ‘내가 한 일’을 마땅히 여길 때 하고 난 뒤에 잊힌다. 그걸 기억하고 언제 무엇을 어떻게 했는데, 하는 식으로 내 것을 가지고 한 것처럼 생각할 때는 주의 사랑으로가 어렵다. 충성도 불의도 내 속에서 자란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곧 주인의 것으로 할 때 손해도 없고 더 큰 이익도 바라지 않는다. 두 달란트면 두 달란트로 족하고, 다섯 달란트면 다섯 달란트로 족하다. 그러나 불의도 같아서 자칫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자라나는 것은 매일반이다.
결국은 물질만능 시대를 살면서 주께 드린다는 것이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날 때는 손익계산을 하기 마련이다. 물질숭배가 괜한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마치 내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하여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 56:11-12).” 그저 하루하루가 분에 넘치는 일로 우리를 괴롭힌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지나친 열심도 그러하고 안 해도 될 곳에 마음을 애써 기울이는 것도 그러하다. 결국 “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6-10).”
족한 줄 알지 못할 때 늘 그에 따르는 열심도 온전할 수 없다. 하여 지혜자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여기서도 지나치다는 말은 스스로가 어찌 하려는 것인데, 우리는 주를 경외함으로 이 모든 데서 자유하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스스로를 옳게 여기는 게 아니라, 주의 뜻을 따라 생각하려 함이다. 오늘 주님이 꾸짖으시는 것도 그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 다소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 부자는 지옥 가고 가난한 자는 천국 가는 듯한 이야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에 대한 내용이다. 나사로는 한 게 없다. 헌데 앓고 빌어먹고 살던 것뿐인데, 저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표면적인 이야기로는 이해가 안 간다. 그러나 예수님의 여러 비유의 말씀 가운데 모두가 익명인데 반해 이를 본명을 붙여 ‘나사로라 이름하는’이라 하였다. 나사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저는 비록 거지로서 한 일이 없는 것 같으나 주어진 헌데를 앓았고, 어느 부자의 집 앞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오늘 우리를 망칠 수 있는 것이 열심이다. 지나치게 교회에 또는 율법에 매여 충성하는 맹신이 곧 우리 영혼을 올무에 걸리게 한다. 하나님 앞에 위선은 스스로의 열심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내가 알기로 자기 열심으로 충성했던 성도들이 보면 제대로 배신을 한다. 교회를 수평이동하고 자주 어떤 불만을 토로하며 평가하는 이는 그 자신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다. 그 판단도 기준도 나름은 성경적이라고 우겨대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정작 순종뿐이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다. 나는 종종 누구와의 대화가 불편한 것은 저가 판단하는 자기아집이 속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탓할 때 흔히 자신을 두둔하듯이 교회를 자주 옮겨 다니는 이들은 저마다 또 그럴 사정이 있다!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한 이를 멈출 길이 없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대하 6:30).” 정작 두려운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그때마다의 내 마음이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주권 아래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릴 어지럽히는 헛된 영광을 버리고,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주신 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할 때 묵묵히 거지로라도 그 맡기신 자리를 지킨다.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85:2-3).
주가 나를 어찌 받아주셨는지를 알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6-7).
그러할 때,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8).
이는,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9-11).
오늘 하루도,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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