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 95:1-2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우릴 삼켰다. 주의 전은 교회이며,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성도의 몸이고,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예수의 몸이시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이를 합하여 우리가 주를 사모함일 테고, 같이 전화나 줌으로 성경공부를 하자는 제안에 친구는 좋아했다. 즉 서로가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고 서로 시간을 맞추기가 여의치 않아 ‘그랬으면…’ 하는 마음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일주일에 한두 번 차를 가지고 출근하는데 보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 걸리니까, 한두 번은 다소 여유 있게 성경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점심 식사 후 2, 30분씩 질문하고 답하는 형식이면 그 또한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오늘 주님을 보며,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하는 말씀에서 문득 어제 친구에게 그리하자고 한 것이 떠올랐다. 제자훈련에 참여하고 그러면서 일주일째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는 말에 내친걸음에 박차를 가한 셈이다. 그리 마음을 주신 이도, 그러겠다고 하는 마음도 모두 주의 영이 함께 하신 것임을 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0-11).
이를 또한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곧 우리가 서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 가운데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는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다른 것으로는 그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늘 친구의 열심이 열심으로 그칠까하여 이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성경에 대해서도 우리는 머리와 가슴과 몸이 모두 함께 해야 하는 것으로 지정의(知情意) 곧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간다는 일은 이 셋이 서로 하나가 되어서였다. 머리로만 성경을 아는 이는 ‘머리만 큰 아이’로 남을 판단하고 성경을 논하기 좋아한다. 가슴으로만 성경을 느끼면 이는 매우 감정적이어서 한껏 울다 웃다 카다르시스에 젖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실천만 있으면 이것이 자기 의가 되어 맹목적인 헌신과 희생으로 그칠 수 있다.
이는 마치 ‘성경 읽기’와 같아서 흔히 사전적인 의미로 문자적인 이해와 해설로 접근하면 안 된다. 또는 지시적인 의미로 너무 지나치게 그 상황이나 열거된 숫자나 모양이나 지역 등에 의미를 부여해서도 자칫 그릇된 해석을 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함축적인 의미로만 접근하면 이는 또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 이 세 가지 해석이 함께 하여 주가 주시는 지혜로 주가 열어 보이시는 언어의 세계를 맛보아야 하는데, 나는 종종 친구에게 ‘말씀을 먹으라’고 권한다. 이때,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1-2).”
이와 같이 나는 우리가 서로의 대화에서 ‘그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더러는 입에 쓰고 혹은 달고, 삼킬 때 잘 넘어가는가 싶다가 얹힌 듯 가슴을 답답하게도 하는 것이어서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2).” 그럼에도 우린 주어진 각자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식을 따라 주가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해보자고 한 것이다.
이는 앞서도 가끔 생각나는 게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삼촌 사탄 스크루테이프는 우리의 열심을 가히 경계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람을 잡는 일 같아서 순간 그러하다 ‘어떤 일’에 부딪치면 금세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가기 마련이라고 한 것과 같다. 곧 우리의 열심은 그다지 신뢰할 게 못 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으셨다. 이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우리들로 영접할 기회를 얻게 하려 하심인데,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곧 어떤 이유에선지 문득 어떤 생각이 충동적으로 들 때가 있다. 그 마음은 일시적일 수 있고 지속적일 수도 있다.
가령 친구는 성경공부를 하게 됐고 그에 따라 새벽예배를 나가고 있는데, 나는 이 일이 지속적이기를 응원하고 기도한다. 무엇을 우선하게 되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늘 평소대로 한 시 두 시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 예배에 참석하려니까 힘에 겹다. 피곤하다고 말하는 저에게 나는 ‘먼저와 나중’의 원리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나 역시 이른 아침, 이 시간을 차지하기 위해 저녁 시간을 포기한다. 전에 즐기던 것을 버린다. 누구와의 저녁 약속도 가급적이면 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려고 몸을 단련한다. 이제는 알람과 상관없이 몸이 기억을 하고 나의 영혼을 움직이게 되었다.
예수님도, 다니엘도, 다윗도 ‘습관을 좇아’ 조용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우리 몸은 그에 맞추기 마련이어서 나는 친구에게도 조금씩 덜 필요한 시간, 소모적인 시간들을 포기할 것을 권하였다. 굳이 안 어울려도 될 사람과의 관계, 마음 쓰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한 과감한 포기, 군더더기가 많던 저녁 시간의 간소화 등 이는 오롯이 새벽 시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다.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지난한 것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제 의식적으로 단순한 삶이 돼야 한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때론 형식적으로라도 또는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서 이를 포기하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무슨 말씀일까?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하셨는데 우리의 많고 적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6).” 천국을 알면 알수록 천국에 대한 열심이 더 생긴다.
그리하여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를 천국에서의 차등, 차별 따위로 해석할 게 아니다. 나는 이해하기를 누구를 사랑할 때 사랑은 하면 할수록 더 큰 사랑을 갈급하게 된다. 유행가 가사 같지만 보고 있으면서 보고 싶고,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혹시 잃을까 하여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는…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 고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열심 혹은 어떤 소망과 믿음도 때가 이르면 사라질 수 있으나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하심은 그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께 향하는 열심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게 아니라, 이룬 구원을 확장하여 더욱 많은, 큰, <하나님의 나>를 누리려하는 것이다. 이에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안 된다. 우리에게는 주가 계신다. 주께 여쭐 일이다. 하여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결국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주가 이루실 것을 알면서도 그리 행함은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우리의 특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아무나 이를 행할 수 없는, 그러나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5-6).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7).
우리는 점점 단순해지고 의연해진다. 어느 순간 나는 좋아하던 친구들과의 즐거워하던 분위기를 더는 바라지 않는다. 누구의 인정과 시선을 크게 바라며 살던 것에서도 놓여났다. 늘 혼자이고 외로운 것 같으나 때론 한 영혼으로 또는 누구 일로 종일 부산하다. 그 일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이 히브리어이고, 저들의 언어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바라고 의뢰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즉 하나님의 시간표 속으로 들어간 삶, 그리하여 나의 하루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아직 그럴 수 있을 때, 나는 묵상할 시간을 먼저 취한다. 이를 글로 쓴다. 오늘은 어깨가 덜 아파서 다행이다. 누구를 생각하고 저를 마음에 두어 씨름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주를 부른다. 설령 내가 저에게 아무리 권하고 간곡히 설득한들, 우린 저를 구원할 수 없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결국 열 가지 재앙이 다 쏟아져 모든 산 것들의 장자를 잃기까지, 갈 데까지 가는 게 그 속성이라…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내가 저를 위해 비는 것은 아직 그럴 수 있어서이다. 곧 이르러 더는 그럴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이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3-24).”
응답은 내 몫이 아니다. 나는 구할 뿐이고, 구하는 동안 내가 주를 더욱 알게 되는 것으로 족하였다. 고로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이로써 됐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주께 아뢸 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하면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게 문제인데….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가 친히 성전이시다. 나는 이를 사모할 뿐이라. 어느 훗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 아직은 모른다 해도 때가 되면 알 일, 그리 알고 나는 무턱대고 주가 더하시는 마음을 수행할 따름이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그렇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95:1-2).
다만 이것이 오늘 나의 즐거운 사명이었으니,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3).
다른 더 좋은 수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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