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 9:41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6-27
보았다, 들었다 함으로 오히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만 못하다. 저들은 자신들이 듣고, 알고, 믿는 것으로 닫혔고 여기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가 보게 됨으로 비로소 열렸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35). 저는 그동안 알지 못하여서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하고 되묻고는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36).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하고 말씀하시자(37),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일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곧 저가 맹인이었으나 순수하게 봄으로 믿었다. 본다고 하던 이들은 자신들이 보고 아는 것으로 설왕설래 씨름하고 논쟁하다 예수를 정죄하였다.
날 때부터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 어쩌다 죄인이 아닌 것을. 또한 서로가 그의 됨을 보고 죄의 결과로 운운하는 것은 어줍다. 제자들이 맹인을 보고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그러자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우리의 여러 상황과 여건이 주어졌다. 이에 바울은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저가 어떠할지,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함부로 속단하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누구를 대할 때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사랑을 달라고 우리는 구해야 한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하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5-16).” 누구를 이해한다는 일은 저의 온 삶을 같이 하는 일과 같다. 원리원칙을 운운하며 상대를 판단하거나 그리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어려움, 어떤 불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데 있다. 주를 바라고 그 마음이 온전하여질수록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되묻게 되는 이유다. 나의 약함으로 내 곁의 약한 자를 위로하게 된다. 내가 어려워하던 일을 두고 상대를 대할 때 저의 어려움이 내 것으로 느껴져서 저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어제도 친구와의 점심시간 통화에서 저들 곁의 한 가정을 두고 마음 쓰고 돌보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 더디기는 하나 아이가 마음의 문을 열어 교회에서 가는 학생부 수련회도 참여하고 다음 달에는 일본에도 같이 다녀올 계획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기까지 수백 번의 관심과 설득과 이해가 필요하였다.
그와 같이 마음이 가는 일, 주의 이름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 복이라. 그리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는 곧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5-6).”
하여 누구는 선교사로 일하다 귀국하여 일시 머물 곳이 없는 선교사의 가족을 위해 선뜻 자신들의 집에 같이 머물게 한다. 곧 우리가 전에는 ‘맹인’이었더니 이제는 봄으로 복되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하심도 전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을 이제는 주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음이었으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이제는 주의하여 안다.
우리에게 향하신 구원의 경로는 모두 다르다. 가령 맹인이 눈을 뜨는 데 있어 오늘 주님은 극적으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 이에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그것으로 본질을 흐릴 것을 알고 계셨다. 이는 주님이 일부러 의도하신 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9).” 하신 것을 알게 한다.
요즘은 그렇듯 점심시간의 짧은 통화와 성경을 나누는 대화가 우리의 실생활로 연관되면서, 성경이 곧 실전인 사실을 알게 된다. 막연히 그렇다는 말로 듣기보다 이를 곱씹고 되새겨 삶으로 이어지는 데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었다. 어떤 일을 두고는 여전히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나 그것까지도 부대끼고 깨어져서 어느 훗날 주를 아는 데에 더욱 선명하게 증거가 될 것을 믿는다. 곧 우리가 살면서 신앙에 눈을 뜬다는 것은 성화를 이뤄가는 데 있어 이 일이 실제적으로 우리 삶을 주도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아내에게 아이들이 모이면서 신기한 것인지 이상한 것인지 스스로 정상이라 여기는 아이들은 떨어지고 다른 곳에서 거절당하던 아이들만 남겨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본인도 이상한지, 그런 아이들에게서 더욱 깊은 사랑을 느낀다고 하였다. 여느 아이보다 두세 배는 더 힘들고 했던 말을 또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데… 결국 우리의 수고는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시 119:18, 28).
하나의 진주는 조개 속살에 박힌 모래알갱이로 고통이 빚어내는 단단하고 영롱한 보석이었다. 우리 영혼이 주 앞에 서는 날 무난하였던 지난날로 감사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주를 바라고 의지하였던 것들로 주를 찬송하게 된다. 곧 “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 8:18).” 우리는 그렇게 외면하고 살았다. 돌아보면 내 곁에 늘 아파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어릴 적 엄마를 폭행하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또는 뇌물을 받고 쫓겨나 친구 건축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늘 잔소리와 성화로 자신의 불안과 초조를 발산하며 진저리나게 하던 엄마에 대하여… 아이들은 신호를 보내듯 글로 썼지만 그때 나는 그러한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한 아이가 실은 ‘은따’로 지내었고, 그러면서도 덧붙이는 과장된 웃음에서 나는 아이의 아픔을 외면했다. 유난히 잘 주던 아이가 실은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과 기껏 먹고 화장실로 가서 토하고 오는 아이의 거식증도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외면하였다. 상대적으로 아이들은 나의 연약함을 편하게 여겨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것인데 나는 주춤, 겁이 나서 물러서기에 급급하였다. 가만히 스쳐가는 그때 그 아이들을 두고 나는 지금도 가끔 주의 용서와 긍휼하심을 구한다. 오늘에 이르러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곧 오늘 내게 더하시는 어떤 어려움은 앞서 단련하시는 것으로 한 영혼을 맡기시고자 하는 데 있다. 그와 같은 설명을 친구에게 하자 저는 그 의미를 알고 있을까? 자신들과 연결돼 있는 그 가정의 아이와 아이엄마를 두고 여러 각도에서 주께 대신 구하는 게 많아졌다. 나는 저의 변화가 놀랍다. 우린 스스로 손해를 알면서도 견디고 참는다. 이는 주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있어 오늘의 이 일이 어떤 의미로 작용할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은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라! 더러는 지치고 힘에 겨워 외면하려할 때,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이와 같은 경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한다. 왜 내게 이와 같은 일을 두셨는가, 생각할 때에 실은 그것으로 나의 영혼을 살리시고 성장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와 같은 구별됨을 가지고 우리는 복음을 나타낸다. 그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 오늘 본문에서 소위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든지 꼬투리를 잡아 시빗거리를 만들어서 정죄하려는 것이다. 이에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8-9).” 굳이 말로 이길 게 아니다. 오히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10).” 어쨌든 듣지 못하는 자는 듣지 않는다.
오늘 본문은 맹인 한 사람의 이야기로 여러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에 주님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이는 곧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이와 같은 말씀에 저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 가운데 오늘 맹인 되었던 자의 대답이 순수하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 저는 그때 예수를 알지 못했고 본 적도 없었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오히려 저의 물음을 허를 찔렀다(27). 그때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30).”
저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를 어찌 저리 말하는가 싶은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39).” 말씀을 말로 들으려니 그 표면적인 내용으로는 이해가 어렵다. 마치 내가 전에 알면서도 알지 못하였던 아이들의 아픔을 두고 탄식하곤 하는 것처럼, 나 또한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았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그러자 예수님의 한 마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
내가 본다고 보고 살았던 것들의 허무함에 대하여,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102:26-27).
우리 하나님의 한결같으심을 두고,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2).
이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아뢸 수 있는 복이 있었으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주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기를, 주님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그러므로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1-12).
하면,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3).
이에,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9-21).
이러한 주의 뜻을 알고, 보고 들을 때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26-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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